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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정한 고고학의 딜레탕트, 시라가 주키치(白神壽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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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고학 취미의 교육자 시라가 주키치

한국 미술사에서 시라가 주키치(白神壽吉, 1889-?)라는 이름은 그리 익숙한 이름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한자 이름을 우리식으로 읽으면 매우 익숙한 이름으로 들린다. ‘백신수길(白神壽吉)’, 정확하진 않아도 한번쯤 어디선 들어본 듯한 이름이다. 기억해보면 그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어느 한 순간에 멈춘다. 그는 일제강점기 당대 최고의 화가로 ‘천재적인 작가’라는 평가를 받았던 이인성(李仁星, 1912-1950)의 어린 시절을 서술할 때 그의 후원자로 늘 등장하던 그 인물이었다. 

“이인성은 수창보통학교를 다니던 시절 도쿄에서 열린 ‘세계아동미술전’에 출품해 특선을 차지했다. 그의 나이 13세인 1925년의 일이다. 3년 뒤인 1928년 10월 ‘세계아동미술 전람회’의 개인 회화부 공모에 수채화 `촌락의 풍경’으로 특선을 하기도 했다. 천재 소년 화가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이 때부터이며 그의 예술에 대한 신념은 이를 계기로 굳혀졌다.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두 차례 입선으로 명망을 얻자 대구여자고등보통학교 교장이던 백신수길(白神壽吉)의 주선으로 미술수업 차 도일해 태평양미술학교에서 본격적인 회화공부를 한다.”

이인성이 일본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이가 바로 ‘시라가 주키치(白神壽吉)’이다. 그는 이인성 외에도 많은 한국 미술가들과 교류를 가졌고, 그들의 후원자가 되기도 하였다. 경주 출신 화가인 손일봉(孫一峰, 1906-1985)이 그림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도운 이도 그였고, 김용조(金龍祚, 1916-1944)의 일본행을 도운 이도 역시 그였다. 그는 고고학에도 밝아 일본에서 유적을 발굴하기 위해 오는 많은 일본인 고고학자들의 손발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또한 자신이 고보 교장으로 재직하던 지역인 대구에서 「대구부사(大邱府史)」를 엮을 때에도 물심양면으로 후원을 하였다. 

시라가 주키치(白神壽吉)는 일본 본주(本州) 서부의 오카야마현(岡山縣) 출신으로, 히로시마(廣島)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에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박물과의 조교를 거쳐 1911년 조교수가 되었다. 1917년 니카타현(新潟縣)의 나가오카(長岡) 여자사범학교 교유(敎諭)로 취임하였다. 1919년 5월 조선총독부공립중등학교 교유에 전임되어 한국으로 왔다. 이후 평안남도에 있는 진남포(鎭南浦)공립고등여학교 교장 겸 교유, 1921년-1924년 평양공립고등여학교 교장 겸 교유, 소학교보통학교 주사, 1924-1925년 경성사범부속학교(京城師範附屬學校) 주사로 임명되었으며 조선총독부편수관을 겸했다. 1926년 4월 조선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교유로 전임되었고, 1926년부터 대구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장에 보임되어 1945년에 해방될 때까지 재직한다.

교육계에서 그의 품성은 활달하고 명랑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한편으로는 유유낙낙(唯唯諾諾)한 탈속의 풍이 있는 사람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평소 취미로 서예를 즐기고, 고고학 연구를 하는 것을 삶의 즐거움으로 여기며 지냈다. 시라가 주키치가 고고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평양고녀(平壤高女)에 근무하던 시절부터인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여가를 이용하여 낙랑문화(樂浪文化)를 연구하기 시작하였으며, 낙랑유물을 중심으로 한국 문화재를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수집품은 선사시대 고고 유물에서 낙랑 유물, 고려·조선시대 도자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1926년 대구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교장으로 부임한 후에는 신라문화(新羅文化)를 연구하기 시작한다.1) 평양에서 재직할 때는 낙랑문화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그의 호기심은 대구로 와서 신라시대의 문화로 관심이 옮겨간 것이다. 신라시대의 토우나 와당과 같은 신라의 토기를 연구하기도 하고, 그와 관련된 유물을 수집하기도 하였다. 이 때 연구한 내용을 「신라문화(新羅文化)」라는 제목의 책으로 발간하기도 하였다.

 
시라가 주키치 「신라문화」와 「이퇴계선생전」


「신라문화」는 1940년에 대구공립고등여학교에서 발행한 책으로 ‘신라의 무사도’와 ‘신라와 낙랑문화’라는 주제를 가지고 구성한 책이다. ‘무사도’는 신라의 정신성을 대표하는 ‘화랑정신’을 말하는 것이다. ‘낙랑(樂浪)’은 보통 두 가지 경우에 쓰이는데 하나는 평양 주변의 문화로 청천강 이남, 황해도 자비령 이북 일대에 있었던 한사군 중의 하나인 ‘낙랑’의 문화를 말하는 것이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경상북도 경주시 일대의 옛 지명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 때 ‘낙랑’이라 불렸던 경주 지역의 신라문화와 옛적 평양 지역의 낙랑문화를 비교한 것이다. 시라가 주키치가 평양여고보 교장을 지내며 낙랑문화를 연구했던 것과 대구여고보 교장을 하며 신라문화를 연구한 경험을 바탕으로 저술한 것이다.
한편 그는 이 지역의 정신적 지주이자 최고의 학자였던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 「이퇴계선생전(李退溪先生傳)」이란 책을 발간하기도 하였다.2) 「이퇴계선생전」은 대구공립고등여학교에서 발행한 30쪽의 간단한 책으로 고보 교육용으로 발간한 것으로 보인다. 이 내용은 1936년에 창간된 재일조선인 신문인 <조선신문(朝鮮新聞)>에 1939년에 다시 연재하기도 한다.


「백신수길씨수집고고품도록」


시라가 주키치는 평양과 경성·대구에 거주하며 많은 한국의 고고학 유물을 수집한다. 이렇게 수집된 유물들은 경성제대 교수이며 경성박물관 관장이었던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 1892-1960)의 추천으로 도록으로 발간된다.3) 석기시대의 토기에서부터 낙랑시대의 유물, 고구려 와당, 신라시대의 화려한 금동 유물 뿐 만 아니라 조선시대의 도자기, 이황, 김정희, 유성룡의 간찰 등 다양한 품목의 유물을 모은 품위 있는 도록이다. 


2. 시라가 주키치의 그림과 그의 소장 작품 몇 점

시라가 주키치의 고고학에 대한 관심은 전문가 수준 이상의 수준이었다. 그는 평소에도 고고학자들과 많은 친분을 가졌는데 그가 만난 이들은 당대 최고 수준의 학자들이었다. 일본 최초의 고고학자인 저명한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 1881-1938)는 경주 지역 고분 발굴 당시 시라가 주키치의 도움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마다 고사쿠는 1921년 발굴된 금관총의 발굴 보고서인 「조선 금관총과 그 유물」4)을 작성하였으며, 1926년에는 경주 황남리의 서봉총을 발굴하는 주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경성제대 교수이자 경성박물관 관장인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 1892-1960), 조선총독부 박물관 관장인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 1907-2011), 경주박물관장 사이토 다다시(齋藤忠, 1908-2013), 경주 박물관에 근무하던 오사카 신타로(大板金太郞) 등과 깊은 친분을 나누었다. 경성제대 교수인 서지학자 이인영(李仁榮, 1911-?)과도 가까운 사이였다. 


시라가 주키치 <신라토기>


시라가 주키치는 평소 서예를 즐겼으나 그림을 즐겨 그리지는 않았다. 정식으로 미술 수업을 한 것 아니기 때문에 전문적인 화가의 붓질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의 고고학에 대한 취미 때문인지 신라 토기를 그린 문인화풍의 그림을 한 점 남겨 놓았다. 먹으로만 토기 다섯 점을 선묘로 단순하게 그린 그의 그림은 그림 전문가의 솜씨는 보이지 않지만 토기 연구자만이 가질 수 있는 고고학 유물의 본질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가 이러한 작품을 남기게 된 것은 일본 최고의 고고학자인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 1881-1938)의 영향으로 보인다. 하마다 고사쿠는 1921년 경주에서 금관총을 발굴하고 그 보고서를 작성한다. 그는 그림에도 일가를 이루고 있어 발굴의 모습이나 유물을 그림으로 그리기도 하였다. 그는 경주에서 머무를 때 시라가 주키치의 많은 도움을 받았다. 시라가 주키치의 소장품 중에는 하마다 고사쿠가 낙랑 유물을 그린 <고물이 잇소>라는 제목의 작품이 한 점 있어 그 영향관계를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고물이 잇소> 


하마다 고사쿠의 작품 <고물이 잇소> 속의 기물은 평양 근처의 낙랑 유적지를 발굴하여 나온 ‘종정(鐘鼎)’이다. 종정의 형태를 정제되지 않은 무심한 붓 선으로 대충 그리듯 툭툭 편하게 그렸다. 치밀하게 계획하지도 않고, 정밀하게 묘사하여야겠다는 의지도 보이지 않는다. 나즈막한 그릇, 적당히 높이가 있는 두 개의 그릇이 적당히 균형을 이루고 있다. 선으로 대상을 그린 후에 종정 면은 옅은 채색으로 가볍게 색을 올렸다. 종정의 있는 그대로의 색깔은 아니다. 오랜 세월을 지내며 퇴색된 고물의 모습에서 느낀 색감을 감각적으로 표현하였다. 초록, 파랑, 갈색의 변조가 자연스럽다. 전문화가의 솜씨는 아니나 오랜 세월을 그림과 함께 한 문인화가다운 느낌을 충분히 보여주는 무르익은 솜씨이다. 기교적인 솜씨 이상의 격조를 담고 있다.

시리가 주키치는 이인성 뿐만 아니라 재능 있는 서양화가 손일봉(孫一峰, 1906-1985)에게도 후원을 하는데, 이런 까닭인지 그의 소장품 중에 손일봉이 신라 토우와 와당을 그린 작은 수채화 한 점이 남아 있다. 


손일봉 <토우와 와당> 


손일봉의 <토우와 와당>은 1928년에 그린 작품이다. 손일봉은 경주 출신으로 1928년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재학시절부터 그림에 재능이 나타나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 1회, 특선 3회를 기록하였으며,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서 1934년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를 졸업하였다. 일본에서는 제전(帝展)과 광풍회전(光風會展)을 중심으로 활약하였으며, 10여년을 북해도(北海道)에서 보낸다. 광복 후 경주에서 생활하는 동안 고등학교 교사, 고등학교 교장을 지내며 작가생활을 거의 하지 못했다. 정년퇴직 후 세종대학교 회화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비로소 본격적인 작가생활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의 회화작품의 특징은 인물이나 정물, 풍경 등 구체적인 대상물을 선택하여 그것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되 묘사의 범위를 최대한 축약시켜 빠르고 큰 붓으로 작업하는 데에 있다. 

이 작품은 종이에 수채로 그린 것으로, 1928년 8월에 그린 것이다. 1928년은 손일봉이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한 해이다. 손일봉이 학교를 졸업하고 시라가 주키치에게 인사를 하러 갔을 때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손일봉은 시라가 주키치와 17년의 나이 차이가 나는 사이였는데, 손일봉의 그림 실력을 익히 알고 있었던 시라가 주키치가 격려 차원에서 만나 그림을 주문한 것으로 보인다. 토우와 와당을 그린 것으로 보아 시라가 주키치의 관심사인 고고학과 관련된 그림을 그려 준 것으로 보인다. 현재 손일봉의 초기작이 별로 전하지 않는데, 이 작품은 1928년에 그린 것으로 그의 나이 22살 때의 작품이니 매우 이른 시기의 작품이다. 현재 전하는 작품 중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일본의 화가들이 한국을 방문할 경우에도 시라가 주키치의 도움을 받는 경우도 많았던 것 같다. 그 중 유명한 일본화가 후쿠다 게이치(福田惠一, 1895-1956)와는 남다른 친분이 있었던 것 같다. 


<운강석불>



<만리장성>


후쿠다 게이치는 시라가 주키치가 사범학교를 다닌 히로시마 출신으로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한 뛰어난 화가였다. 그는 졸업 후 교토로 가서 니시야마 스이쇼(西山翠嶂 1879-1958)의 화숙에서 교토화파의 그림을 배운다. 후쿠다 게이치는 중국을 여행하기 위하여 한국을 들렸던 같다. 한국을 여행하며 경주에 들려 시라가 주키치를 만나 정을 나누었을 것이다. 한국 여행을 마치고 중국에 들어가 풍물을 그리며 여행한다. 중국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시라가 주키치에게 들려 중국에서 그린 그림을 선물로 주고 일본으로 돌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을 풍물 중 <운강석불(雲岡石佛)>·<만리장성(萬里長城)> 등을 준 것은 시라가 주키치의 고고학적 취향에 맞추어 선물한 듯하다.

<운강석불>·<만리장성> 두 점 모두 옅은 채색을 넣은 수묵담채화이다. 청먹(靑墨)을 써서 먹이 가지는 강한 느낌을 줄이고, 윤곽선을 생략하고 채색으로 대상을 표현하는 방식이 맑은 수채화를 보는 듯하다. 작품의 주제 대상을 포착하는 것도 운강석불은 거대한 부처의 머리 부분만을 떼어 부드러운 선묘로 대상을 그리고, 물감의 번짐을 이용하여 부처의 미소를 표현한 솜씨가 매우 고급스럽다. 기교보다는 구성, 구성보다는 격조가 강조된 그림이다. 만리장성을 그리면서도 만리장성의 위압적인 모습보다는 산의 거대함을 강조하여 그 위에 장성이 있음을 표현하여 장성의 위대함을 표현하고 있다. 역시 물감의 번지는 기법이 잘 발휘된 수작이다. 교토화파의 역사화 기법이나 신남화(新南畵)를 많이 연구한 후쿠다 게이치의 격조 높은 솜씨를 잘 보여준다. 

시라가 주키치는 이들 외에도 금릉위 박영효(朴泳孝, 1861-1939)와 같은 정치인, 김정희의 후손인 죽하(竹下) 김승렬(金承烈) 등과도 교류를 하여 그들로 받은 작품을 소장하고 있었다. 모두 그들의 작품 중에서 빼어난 격조를 보이는 수작들이다. 시라가 주키치의 심미안이 매우 높은 경지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일면이라 할 수 있다. 

시라가 주키치는 비록 일본인이었으나 다른 일본인들과는 행동이 달랐다. 그는 교육자로서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 그가 주로 재직했던 평양과 대구에서서는 그 지역을 연구하고 그 지역의 문화계를 위해 후원을 하기도 하였다. 평양에서는 낙랑문화에 관심을 가졌고, 대구에서는 신라문화를 연구하였다. 대구에서는 이인성 등 많은 문화 예술인을 돕기도 하였다. 그는 비록 본인이 예술가로서 활동한 것은 아니지만 예술의 지고한 정신을 이해하고 있었던 진정한 ‘딜레탕트(dilettante)’ 문화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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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慶尙北道 大邱府 三笠町(현 삼덕동) 23
2)  「이퇴계선생전(李退溪先生傳)」1935년 대구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발행 單冊 (日文本)
3)  白神壽吉氏蒐集考古品圖録, 朝鮮考古學會編, 京都, 桑名文星堂, 1941.11
4)  1921년 「조선 금관총과 그 유물」『고적조사특별보고』제3책, 조선총독부, 1922
글/ 황정수 관리자
업데이트 2017.08.17 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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