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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타야마 탄의 <구(丘)>와 김기창의 <엽귀(饁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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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타야마 탄의 제15회 조선미술전람회 출품 수상작 <구(丘)>

김기창이 제15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엽귀(饁歸)>로 입선을 하는 1935년에 가타야마 탄(堅山坦)이라는 일본인 화가도 <구(丘)>라는 제목의 작품을 출품한다. 이 두 작품은 유사한 소재를 바탕으로 그려 당시 화제가 되었다. <엽귀>를 그린 김기창은 당시 22세의 약관의 나이의 젊은 화가였으나, 가타야마 탄은 이미 조선미술전람회 초기부터 출품하여 입상을 거듭하며 한국화단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중견 화가였다. 그는 1923년 한국으로 온 후 다음 해부터 조선미술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하기 시작하여 처음 출품한 제4회에서 특선을 하여 4등상을 받으며 혜성과 같이 등장한다. 이후 입상을 거듭한 그는 7번에 걸쳐 특선을 하고, 제17회전부터는 심사에 참여하는 등 화가로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다. 그는 동양화뿐만 아니라 서양화에도 조예가 있어 제5회전과 제13회전에서는 서양화부에서 <정물>이라는 제목의 작품으로 입선을 한다. 

가타야마 탄이 <구(丘)>를 출품한 14회는 추천제도가 새로 만들어진 해이다. 그는 첫 대상자로 선발되어 ‘추천작가’의 자격으로 출품하는 영예를 누리게 된다. 이 추천제도는 제1부 동양화부, 제2부 서양화부에 각각 5인씩과 제3부인 조각과 공예부에 3인으로 모두 13인이었다. 이번에 추천된 자는 전람회 초기 때부터 역작을 출품하여 특선의 영예를 거듭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심사위원장의 추천에 의하여 선발되면 영원히 무감사(無鑑査)로 진열하는 우대를 하는 것이었다. 처음으로 동양화부에서 추천작가로 위촉된 작가는 한국인으로 이상범(李象範)과 이영일(李英一) 두 사람이었고, 일본인으로는 마쓰다 레이코(松田黎光), 가타야마 탄(堅山坦), 가토 쇼린(加藤松林) 등 세 사람이었다.1) 가타야마 탄의 입장에서는 화가로서의 입지를 구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는 사건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제17회(1938년) 전람회부터는 동양화부 심사참여에 위촉되어 조선에 거주하는 화가로서는 최고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가타야마 탄은 당시 경성에서 화숙을 열고 있었다. 그의 화숙 이름은 <유서회(柳絮會)>였다. 화숙이 있었던 장소는 경성부(京城府) 앵정정(櫻井町) 2정목(丁目) 181번지로 현재 중구 인현동 2가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김은호나 김기창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는 교토 출신의 시조파(四條派) 화가로 교토 지역 화가들이 대개 여러 화목에 능한 장점을 가지고 있었듯이, 그도 다양한 분야의 그림에 모두 능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풍경과 화조에 장점이 있었다. 그는 한국에서의 활동을 바탕으로 일본에서 첫 전시회를 연다.
가타야마 탄의 첫 번째 개인전은 1940년 6월 19일 도쿄의 신주쿠(新宿)에서 열린다. 당시 도쿄 화단에서는 이름이 낯선 화가의 전시회가 많은 화제가 되었다. 전시회의 제목은 <조선풍경전(朝鮮風景展)>이었으며, 전시된 작품은 모두 한국의 풍경을 그린 것이었다. 당시 일본인에게 ‘조선(朝鮮)’이라 불린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으니, 일본인이 한국의 풍경을 그린 작품을 도쿄에서 전시회를 연다는 것은 매우 이색적인 광경이었다.

일본 전시를 마친 가타야마 탄은 이듬해 1941년 3월 11일에서 3월 15일까지 4일 동안 경성의 정자옥(丁子屋) 화랑에서는 두 번째 개인전이 연다. <견산탄 개전(堅山坦 個展)>이라는 제목으로 열린 전시회는 일본에서 못지않게 많은 화제가 되었다. 이 때 출품 작품들도 주로 조선의 풍광을 화폭에 옮긴 작품들이다. 전 해에 도쿄에서 있었던 성공적인 전시회의 내용을 경성으로 옮긴 듯 작품들은 조선의 평화로운 농촌 풍경을 그린 <춘일지지(春日遲遲)>나 경복궁 내의 아름다운 정자인 향원정을 그린 <향원정(香遠亭)>과 같은 한국의 정서를 담은 것들이었다.

당시 전람회에 출품된 그의 작품들에 대한 평가는 일본인 심사위원들이나 한국인 평론가들 에게 모두 지나칠 만큼 좋은 평가를 받는다.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했던 작가들 중에서 이 만치 좋은 평가를 받은 화가를 찾기란 매우 어렵다. 특히 ‘조선의 특색을 가장 잘 표현한 작가’라는 평가가 그의 미술 세계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는 당시 일본인 문화계 인사나 김은호·김기창·이상범 등 한국의 화가들과 가까이 지내는 등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가타야마 탄은 해방이 되고 일본으로 돌아가 고향인 교토에 자리 잡고 생활한다. 한국에서는 뛰어난 화가였지만, 오랜 세월 고향을 떠나 생활한 탓에 돌아간 고향에서는 화가로서의 대접을 받지 못한다. 작가로서의 의식이 강했던 그는 일본에서도 주위의 편견에 아랑곳하지 않고 남은 평생 그림을 그린다. 

이렇듯 화가로서 한 평생을 살다 간 그의 작품이 그동안 한국에서 발견된 것은 한 점도 없었다. 더욱이 오래 동안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상을 한 여러 출품작 중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정말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필자는 조선미술전람회의 기록을 보며 그의 여러 작품 중 김기창의 작품과 함께 출품되었던 <구>라는 작품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미 한국미술사에서 유명해진 김기창의 <엽귀>와 소재와 구도도 유사하고 두 사람은 이미 서로 익숙한 사이였기 때문에 많은 영향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록 속에 있는 도판은 희미한 흔적만 보일뿐 작품의 면모를 알기는 어려웠다. 간혹 연구 중에 가타야마 탄을 생각하게 되면 항상 <구>라는 작품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조선미술전람회 도판


가타야마 탄에 관심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한국화단의 중심부에서 활동하였지만 존재하는 자료가 넉넉하지 못해 연구의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던 중 필자는 우연히 가타야마 탄의 작품으로 제작한 봉함엽서를 발견한 것을 계기로, 2015년 <가장 조선적인 일본인 화가, 가타야마 탄(堅山坦)>이라는 글을 쓰게 되었다. 조선미술전람회와 관련된 신문기사나 잡지의 기록을 중심으로 가타야마 탄의 삶을 겨우 재구하는 소득을 얻을 수 있었다. 글을 쓰면서도 도록에 남아 있는 그의 뛰어난 작품들을 보며 실물을 볼 수 없음에 아쉬움을 금할 수 없었다. 

글을 쓴 이후 1년의 세월이 흘렀다. 부끄러운 이 글이 소문이 나 일제강점기 미술을 공부하는 사람들 사이에 ‘가타야마 탄’이라는 화가가 약간의 관심이 되었다. 그동안 일제강점기를 연구하는 자료에서 ‘견산탄(堅山坦)’이라는 이름이 ‘편산탄(片山坦)’으로 혼동되어 전하기도 하던 것에 비하면 뿌듯한 일이었다. 그러한 시간이 흐르며 1년여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놀랄만한 소식이 들려왔다. 2016년 7월 어느 날이었다. 필자의 공부를 도와주던 친구에게서 들뜬 듯한 느낌의 연락이 왔다. 당신이 글을 썼던 가타야마 탄의 작품 한 점이 일본에 전하는데 관심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것도 엄청난 대작인데, 한국 여인을 소재로 한 작품이라는 것이었다. 실물을 보지 못했던 필자는 보고 싶은 욕심에 이것저것 묻지도 못하고 무조건 구해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상황을 물으니 생각 이상의 특별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바심이 났지만 작품이 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얼마 후 작품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갔다. 첫 눈에 비범한 작품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작품은 두 폭으로 만들어진 가리개 형식으로 된 것이었다. 좁은 방에서는 활짝 펴기 힘들 정도의 규모였다. 조심스럽게 펼쳐 작품을 본 필자는 소스라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의 인물과 풍경을 화려한 채색으로  그린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작품이 처음 본 작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었다. 기억을 되살려 보고, 또 생각해 보니 이 작품이 바로 가타야마 탄에 대해 글을 쓰며 그토록 아쉬워했던 <구(丘)> 그 작품이었다. 특별한 인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미술품은 애타도록 간절한 마음으로 보기를 원할 때 만나게 된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 

그에게 작품이 일본에서 전승된 내력에 대하여 들은 것에 대해 물었다. 이 작품은 일제강점기부터 일본에서 전승되어 내려온 것으로 가타야마 탄이 도쿄에서 전시하였을 때 구입한 것이라 한다. 이 말을 신뢰하고 생각해보면 이 작품은 가타야마 탄이 도쿄에서 첫 전시를 열었던 194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인 손에 들어가 지금까지 전해온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니 <구>는 1935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추천 작품으로 출품되었다가 5년 후 도쿄 전시회에 출품되어 판매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한국에 살던 일본인 화가가 그린 작품이 일본으로 건너간 지 76년 만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작가의 손을 떠난 미술품이 소장되는 과정에서 파란만장하면서도 운명적인 유전 과정을 느끼게 한다.     
       


가타야마 탄 <구(丘)> 


가타야마 탄의 <구>는 일단 크기 면에서 압도하는 느낌이 들 만큼 큰 규모의 작품이다. 세로의 길이가  169cm이고, 가로는 186cm이다. 김기창의 <엽귀>가 세로 170.5㎝, 가로 110㎝의 현대 서양화 크기 단위로 100호가 넘는 대작임에 비하면 <구>의 크기는 ⅓ 정도가 더 크니 호수로 150호 가량 되는 대작이다. 대작이 많은 현대 미술의 개념으로도 큰 작품인데, 전시장 규모가 크게 못했던 일제강점기로서는 보기 쉽지 않은 대작이다. 오른 쪽 위쪽으로 수결과 인장이 찍혀 있다. ‘탄(坦)’이라는 한자 수결이 있고, ‘한성견산탄(漢城堅山坦)’이라는 주문방인이 찍혀 있다. 

오른 쪽으로 수수밭을 상징하는 결실이 된 수수 네 가지를 그렸다. 그 왼쪽으로 한복을 입은 단정한 한 여인이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어린 딸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주 대상 뒤의 배경으로 아래쪽으로는 산이라고 보기에는 나즈막한 구릉 같은 것이 깔려 있고, 위쪽으로 저녁 무렵의 하늘에 아름답게 노을이 지고 있다. 인물이 있는 풍경을 그리면서 주 사생 대상을 앞으로 끌어내어 화면 가득히 그리는 것은 한국의 조선시대 미술의 전통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기법이다. 이는 서양화 기법의 영향을 받은 일본화의 전형적인 묘사 방식이다. 제목을 ‘구(丘)’라 한 것도 작품의 주 대상을 피해 사소한 것에 관심을 두는 일본인의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내용은 한국인의 모습을 그렸지만 풀어가는 방식은 전형적인 일본의 개량된 그림이다. 

이 작품의 최고의 미덕은 능란한 기교를 보이는 대상 묘사와 채색에 있다. 인물의 묘사나 수수와 꽃의 묘사가 섬세하기 이를 데 없다. 여인의 눈매나 광주리의 세부적인 표현이나 수수 잎의 쇄락한 부분의 표현 등은 정교하기 이를 데 없다. 채색은 분채(粉彩)와 석채(石彩)를 섞어 화려한 색감을 자랑하고 있다. 교토화파 화가들이 주로 그렸던 역사화에서 보이는 화려한 채색 방식이 잘 드러나 있다. 두 모녀의 한복의 채색은 한 틈 흐트러짐 없는 밀도를 보여주지만 한국인이 느끼는 한복의 색감과는 정서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빈틈이 보이기도 한다. 외국인이 느끼는 부조화한 색감의 표현은 피할 수 없는 어려움이다. 작품의 주 대상인 인물 앞으로 수수 네 가지를 화면 앞으로 당겨 그렸는데, 과감하게 부분만을 잘라 그렸다. 이 또한 한국의 그림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기법이다. 부분을 그려 전체를 보여주려는 작가의 계산된 의도가 잘 표현된 모습이다. 

이렇듯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가타야마 탄의 <구(丘)>는 앞서 말한 대로 1935년 제14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되어 입선한 작품이다. 이 해는 그가 처음으로 제정된 추천작가 자격으로 출품되었으니, 수상의 등위는 크게 의미를 갖지 않았다. 큰 상을 수상하지는 않았지만 이 작품은 당해 전람회에서 매우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 되었다. 미술평론에 재능을 보였던 야수파 화가 구본웅은 매일신보에 실은 <선전의 인상>이란 글에서 가타야마 탄의 작품 <구>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노련한 필치와 번화한 색채로 순서 있게 그려진 대작의 하나이나 배경의 노을(霞)을 표현한 호분의 용기(用技)이며 구름의 입체가 화면구성에 그다지 좋은 결과는 주지 못할 듯한 감이 있으며 부녀가 머리에 인 광주리의 중심이 나변(奈邊)으로 동하고 있게 보이는가? 소아의 댕기 빛은 주홍색이 치마의 분청색과 보색작용을 일으키게 되었음도 좋지는 않을 것이다.” 2)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되는 동양화 작품들이 대부분 큰 작품들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이 작품은 대작에 속하는 작품이었던 모양이다. 커다란 작품을 제작하면서도 능란한 필치를 보인 노련한 솜씨를 칭찬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인이 한국의 풍속을 그린 까닭에 광주리를 이는 균형감과 한국적 색감의 부조화가 아쉽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다른 이의 작품 평가에 가혹했던 구본웅의 평가로는 이색적으로 많은 관심을 보여준 작품이다. 이렇게 관심 있는 평가를 한 것은 가타야마 탄이 당시 한국 화단에서 비중이 높았고, ‘가장 조선적인 풍경’을 그린 작가라는 평가가 높았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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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今年 創始의 推薦制度> 동아일보 1935년(14회) 1935. 5. 17. (2)
2) 具本雄 <鮮展의 印象> 매일신보 1935년(14회) 1935. 5. 23. (1)∼5. 26 (朝) (1)
글/ 황정수 관리자
업데이트 2017.10.18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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