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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타야마 탄의 <구(丘)>와 김기창의 <엽귀(饁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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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황정수(미술사)

1. 김기창의 <엽귀(饁歸)>로 본 조선미술전람회의 향토색

1935년에 열린 제14회 조선미술전람회 동양화부의 심사위원으로는 일본의 저명한 화가였던 마에다 세이손(前田靑村, 1885-1977)과 노다 규호(野田九浦, 1880-1971)가 위촉되었다. 이들은 그동안 조선미전이 많이 발전하여 수준이 높아졌음을 칭찬하며, 부족한 부분이 있지만 어떤 작품은 일본화단에 내어 놓아도 빠지지 않음을 드러내었다. 그럼에도 너무 일본화의 관습을 좆는 것은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특히 노다 규호는 미전의 작품들이 일본화의 경향을 따르는 바가 크고, 기교에만 힘쓰고 내용이 부족한 작품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대체로 중앙화단의 류(流)를 받은 경향이 있다. 전부터의 관습도 있을 것이나 일본화의 관습을 좇은 기분이 매우 있다. 그리고 기술만 나타내기에 힘쓰고 내용이 없는 것이 있었다. 내용이 진보된 금일에는 내용을 기술보다 중히 여기는 경향이다. 그 중에 二, 三점은 중앙화단에도 손색이 없을 만한 것이 있었다.” 1)

노다 규호는 요즘 미술계의 경향은 내용이 기술보다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만큼 세련된 일본화 화법의 기교만이 강조된 작품들이 만연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실제로 전람회에 입상한 작품들을 살펴보면 동양화부에 입상한 작품이 모두 75점인데, 그 중 인물 중심의 채색화가 33점, 일본화풍의 채색화조화와 산수가 32점이다. 전체의 85%에 해당하는 양이다. 일본화풍이 덜한 산수화는 10점에 불과하다. 그만큼 일본화풍의 그림이 만연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 해에 한국인의 작품 중에서는 단연 김기창(金基昶, 1903-2001)의 작품이 화제의 대상이었다. 그는 1931년 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처음 등장한 이래 연거푸 입상의 쾌거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1892-1979)의 제자로 농아라는 신체적 결함을 극복하고 훌륭한 성과를 이루어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고 있었다. 그가 출품한 작품은 <금운(琴韻)>과 <엽귀(饁歸)> 두 점이었다. <금운>은 특선에 들었고, <엽귀>는 입선에 머물렀다. 일본인 심사위원들의 심사와는 달리 당시 한국 평자들은 <금운>보다는 <엽귀>에 더욱 좋은 평가를 하였다. 이민족간의 정서상의 차이가 아닌가 생각된다.    

<엽귀>에 대해 조각가이자 평론을 겸하였던 김복진(金復鎭, 1901-1940)은 “인물화로서 가작”2)이라 하였다. 또한 비평의 눈이 매서웠던 화가 김종태(金鍾泰, 1906-1938)는 “비난할 곳 없는 작품입니다. 그러나 제작에 대한 예술적 욕구에 숙(熟)이 적었습니다. 그것이 이유 없이 작품의 레벨을 한층 낮게 한 것입니다.”3)라 하였다. 직접적으로 나쁜 평가를 할 부분은 없지만, 어딘가 아쉬운 부분이 있다는 점을 부드럽게 표현하였다. 이들에 비해 화가 이마동은 동아일보에 실은 <미전 관람 우감(愚感)>이란 글에서 더욱 직접적으로 <금운>보다는 <엽귀>가 더 좋은 작품이라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기교적으로는 상당한 수완을 가진 작가다. 그러나 <금운(琴韻)>에 있어서는 너무나 색이 거무충충하며 무겁다. 의지가 확연한 것같이 생각되지 않는다. <엽귀(饁歸)>가 좋은 감흥을 준다. 씨(氏)의 작(作)에서 이 작을 취할 것이겠다.”4)
 
일본인 심사위원들은 기생이 거문고를 타고 있는 모습을 그린 <금운>에서 이국적인 정서를 느끼는 한편 일본 게이샤들을 그린 우끼요에의 전통과 유사하면서도 다른 일면이 있는 채색화에서 매력을 느꼈을 것이다. 그에 비해 한국인 비평가들은 피지배 민족의 현실과 괴리된 모습을 그린 세속적인 내용의 <금운>보다는 식민지를 살아가는 평민들의 모습을 그린 <엽귀>에서 더 큰 예술적 감흥을 느꼈을 것이다. 이러한 차이가 두 작품에 대한 평가를 다르게 했을 것이다.

당시에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엽귀>는 다행히 현재까지 실물이 전한다. 현재는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으로, 어려운 한자로 되었던 제목이 이제는 <가을>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전한다. 조선미술전람회가 열린 이후 80여 년의 세월이 지난 2013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한국 근대미술 100선>이란 전시가 열린다. 이 전시에 본래 <엽귀(饁歸)>란 제목으로 출품되었던 이 작품이 여러 수장 경로를 거치며 <가을>이란 제목으로 바뀌어 출품된다.(이 글의 성격상 이후로는 작품의 제목을 출품 당시의 제목인 <엽귀>라는 이름으로 통일한다.) 이 작품이 일제강점기에는 다른 작품들에 비해 더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를 받지 못하였는데, 지금에 그의 초기 대표작으로 한국 근대미술사를 수놓는 이유는 무엇일까?  


김기창 <엽귀(饁歸)>1935, 비단에 채색, 170.5 x 109 cm


<엽귀>는 김기창이 일제강점기 가을 농촌의 일상적 풍경을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은 1935년 조선미전에 출품되었으나 실제 그려진 것은 출품을 준비하며 1934년에 제작된 것이다. 작품의 재질은 비단 바탕이며, 수묵채색으로 그린 채색화이다. 조선미술전람회 출품작답게 세로 170.5㎝, 가로 110㎝의 큰 규모의 작품이다. 화면의 오른쪽 하단에 운보(雲甫)의 초호이던 ‘운포(雲圃)’라는 낙관이 확인된다. 이 작품은 젊은 시절 김기창이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작품으로 기대가 컸으나 입선에 머무는 아쉬운 결과를 낳은 작품이다. 

김기창은 <엽귀>를 그리며 사실적인 사생을 기초 삼아, 호분과 두터운 채색을 이용하여 인물, 식물 및 배경 묘사에 힘을 기울였다. 이는 김기창이 1931년부터 수학하던 김은호의 개인 화숙인 낙청헌(絡靑軒)에서의 학습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김은호가 이끌던 낙청헌 화숙의 화풍은 기법으로는 대개 채색화 중심이었으며, 소재 상으로는 인물과 화조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스승의 화풍을 철저히 사숙하였으며, 1930년대 이후 조선미술전람회에 관전풍(官展風)의 동양화를 출품하였다. 그는 1935년 조선미술전람회의 심사위원으로 참석한 노다 규호(野田九浦, 1879-1971)에게 깊은 감화를 입고, 이후 그의 도쿄 화숙을 찾아 새로운 미술 양식을 배우기도 한다.

그 동안 <엽귀>, 이 작품에 대한 해석과 평가는 명확하지 않았다. 그동안 미술 연구자들은 일반적으로 출품 당시 붙였던 ‘<엽귀(饁歸)>’라는 제목을 ‘들밥(饁)을 내어오는 여인(饁婦)이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이라 해석하였다. 이 작품의 내용에 대해서도 ‘조선 후기 풍속화의 모티브를 근대적 인물화로 재해석한 것’이란 평가를 하였으며, 김기창의 공력이 한껏 발휘된 역작이라 생각하여 미술사적으로 높게 평가하여 왔다. 어떤 이는 그림 속의 여인은 한국 농촌의 부녀자로 청명한 가을 하늘과 훌쩍 큰 수수밭을 배경으로 오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어떤 이는 그림 속의 세 사람은 삼남매로 큰 누이는 함지박을 머리에 이고 걸어가고, 함께 걷는 맨발의 건실한 소년은 동생으로 수수 이삭을 장난스럽게 베어들고 있고, 막내 동생은 누이 등에서 잠이 든 천진한 모습으로 묘사되었다고 설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면 조금 더 정치한 해석의 필요가 느껴진다. 이 작품 속의 세 사람은 삼남매로 생각된다.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1935년은 일제강점이 무르익은 시절이었다. 당시 식민지 치하의 어려운 생활 속에서 부모들은 모두 들에 나가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집에서 편히 쉴 수 없었던 큰 누이는 어렵게 먹을거리를 준비하여 새참을 들고 부모님이 일하고 있는 들로 나간다. 동생들은 집에 있기도 어렵고 심심하기도 하여 누이를 따라 나선다. 새참을 먹은 후 저녁 무렵이 되자 누이는 두 동생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다. 

머리에는 채반을 이고, 등에는 막내 동생을 업고 힘들게 온다. 채반을 이고 오는 것도 힘든데, 어린 동생까지 업고 오니 보통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먹을 것은 적고 아이는 많은 그 시절에 큰 누이로 태어난 여자에게는 어쩔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일상이었다. 낫을 들고 오는 맨발의 동생은 수수 한 가지를 잘라 손에 들고 온다. 자기 집 소유의 밭인지는 몰라도 장난스럽게 잘라 올 일이 아니다. 아마 배고프던 시절인 당시에 집에 가지고 가서 군것질로 먹으려고 가지고 가는 듯하다. 당시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식민지하의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생각된다. 소년의 맨발의 모습이 당시 어려운 현실을 대변하는 듯이 보인다.  

한편, 이 작품 속의 아이들의 얼굴이나 손발은 햇볕에 검게 타 있다. 한여름 동안 검게 그을린 어린 아이들의 모습은 가을이 되도록 여전하다. 1934년에 발표되었던 이인성의 <가을 어느 날>과 같은 작품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모습과도 유사한 느낌을 준다. 이처럼 순수하면서도 현실적인 농촌의 묘사는 1930년대에 논란이 되었던 ‘향토색(鄕土色)’ 논의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향토색’이란 일제강점기에 강조되었던 한국 특유의 향토색을 작품의 소재로 삼을 것을 장려한 것이다. 이로 인해 한국의 풍물, 목가적인 소재를 회화의 주제로 삼거나 ‘로컬 컬러’, 향토적 서정주의가 작품에 드러나게 된 현상을 의미한다.

‘향토색’은 도시적 정서와 대칭을 이루는 말로 전통적인 향촌의 경관과 풍물에 담긴 고유의 정서나 특색을 일컬으며, 이는 일제 강점기의 문예계 전반에 걸쳐 크게 유행하였다. 미술 분야에서 향토색은 ‘지방색(local color)’ 혹은 ‘반도색(半島色)’이라는 용어와 함께 쓰이며, 조선미술전람회 일본인 심사위원을 통해서 1920년대 초부터 적극 권장되었다. 그러한 결과로 초가집, 장독대, 흰 옷, 빨래하는 여자, 아이 업은 여자, 담뱃대를 문 노인 등 민속적이고 풍속적인 소재들이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향토색의 유행은 1930년대에 접어들어 윤희순(尹喜淳), 김용준(金瑢俊), 김복진 같은 한국인 평자들이 원시적 색감(노랑저고리, 단청의 고궁)과 소재주의에 고착된 조선미술전람회의 “병적 향토취”를 비판하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조선 향토색의 발현을 촉구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향토색은 한국인이 주체가 되고 한국인에 의해 추진되어 움직이는 이념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으로 윤희순은 황폐한 산과 쓸쓸한 들판이 등장하는 ‘절망적 정조’를 퇴출시키고, ‘에너지가 약동하며 자유 발랄한 향토색’의 창출을 촉구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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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野田九浦 <美展 初入選된 기쁨과 매일신보> 1935년(14회) 1935. 5. 14. (朝) (5)
2) 金復鎭  <美展을 보고 나서-나의 回顧와 漫想> 조선일보 1935년(14회) 1935. 5. 20. (4)
3) 金繪山 <朝鮮美展寸評 西洋畵部> 조선일보 1935년(14회) 1935. 5. 26. (6)∼6. 2. (4) 
4) 靑駒生 <美展 觀覽 愚感> 동아일보 1935년(14회) 1935. 5. 23. (3)~5. 28. (3) 총5회 연재 
글/ 황정수 관리자
업데이트 2017.12.12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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