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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전칠기의 세계화를 꿈꾼, 근대 공예가 수곡 전성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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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새로 발굴된 전성규의 가장 큰 작품인 <산수문 책상(山水紋 冊床)>

<산수문 나전칠 대궐반>이 발견된 이후 이 작품은 한국의 나전칠기 작품의 최고 작품으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작품의 출현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 촉진제가 되기도 하였다. 사실 우리나라의 민간에서 사용하고 보관하던 나전칠기 작품은 대부분 실제 사용을 하는 소모품이었기 때문에 남아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궁중에서 사용되던 것은 귀하게 쓰이고 후에는 박물관에 남아 있을 수 있어 솜씨 좋은 작품이 남아 있지만, 민간에서 사용하던 작품은 소모되었거나 전란으로 소멸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이에 비해 주로 완상용으로 지녀 왔던 일본에서는 거의 사용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존 상태도 좋고 작품의 수준도 우수한 작품이 남아 있었다. 현재 전하는 일제강점기의 우수한 나전칠기 작품은 대부분 일본에서 전해 오던 것을 한국인 구입하여 온 것들이다. 이러한 이유로 새로운 전성규의 작품이 발견된다면 그것은 일본에서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우리나라는 오래 전 전란으로 많은 작품이 파괴되었고, 실제 사용하던 것들은 오랫동안 보관되면서 자개가 떨어지고 칠도 벗겨지면서, 새로 나온 금속제품들로 바뀌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밥상이나 책상, 장롱과 같은 가구는 동(銅)이나 합판으로 만든 것으로 바뀌면서 점차 나전칠기 작품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러한 현실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하였던 나전칠기 작가들의 작품을 찾아보기 어렵게 하였다. 전성규의 제자들인 김봉룡, 송주안 등 명장들의 작품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더욱이 이들의 스승인 전성규의 작품을 만나는 것은 기대하기 힘든 일이었다.  

 


전성규 <산수문 책상>    

  
그러던 2014년 8월 뜻하지 않은 곳에서 전성규의 새로운 나전칠기 작품이 발견되었다. 그것도 일본이 아닌 한국의 강화도에서 발견되었다. 1937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작 <산수궤>와 손혜원 소장의 <산수문 나전칠 대궐반>과 거의 같은 형태의 작품이었다. 오래 사용하였던 타인지 아니면 습기가 많은 곳에서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탓인지 상태는 썩 좋지 못하였다. 이 작품은 오래된 고물(古物)로 내려오며 이름조차 갖지 못한 ‘불행아(不幸兒)’의 모습처럼 처절하게 망가진 모습으로 필자의 앞에 나타났다. 
삼베로 두텁게 초벌 하여 붙인 천은 일어나 있고, 자개는 시간에 흐름에 따라 자꾸 떨어지고, 상판의 나무는 갈라지고 옷 칠이 일어나는 등 처참한 모습이었다. 하얀 빛깔이나 무지갯빛을 띠어야 할 자개는 오래되어 노랗게 변하여 누런빛을 띠어 오히려 오래된 유물의 느낌이 느껴졌다. 매우 당황스러운 모습이었지만 필자는 무덤 속에서 깨진 유물을 수습하는 고고학자의 마음으로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감사하게 맞았다. 상태가 나쁜 탓인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입수할 수 있었다. 작품의 입수를 위해 도와준 미술 애호가 최상수 선생에게 고마움을 표합니다. 
  
신기한 것은 처음 보는 작품인데도,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물건에는 주인이 따로 있다(物有各主)’는 옛말이 생각이 났다. 간절히 찾던 필자에게 이 작품이 찾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처참하고 초라한 모습조차도 필자에게는 아름답게 보였다. 애타게 찾아 헤매던 작품을 만나고 보니, 마치 잃은 자식을 찾은 듯 심장이 뛰었다. 이러한 두근거림은 며칠 동안 지속되었다. 보고 또 보고. 볼 때마다 상처가 심한 외상에 가슴이 아팠다. 마치 우리의 전통이 현대 문물에 밀려 자리를 잃고 고생한 흔적 같아 서글픈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전성규 <산수문 책상> 상판 부분


귀하디귀한 전성규의 작품이 두 번째로 발견되는 순간이었음에도 즐거운 마음만은 아니었다. 필자는 새로이 맞아들인 작품에게 이름을 지어 주기로 하였다. 작품에 꼭 맞는 이름을 붙여주기로 하였다. 이를 위해 먼저 작가인 전성규의 마음을 헤아려 보기로 하였다. 그가 살아 있다면 무엇이라 불렀을까 생각해 보았다. 이름 짓기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먼저 그가 조선미술전람회에 남긴 작품의 제목을 살펴보기로 하였다. 작품의 실용성에 맞추어 작품의 이름을 지었던 전성규의 뜻에 따르기 위해 1937년 출품작 <산수궤>를 참고하기로 하였다. 
‘산수 책상’이라는 개념의 <산수궤>라는 이름을 지어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고, 비교적 권위적인 느낌이 덜 들도록 한 전성규의 뜻에 따라 개념 설정을 하였다. 전성규의 생각에 동감을 한 필자는 같은 이름인 <산수궤>라 하고 싶었다. 하지만 형태가 유사하더라도 이름이 같으면 연구자나 애호가들이 혼동하기 쉬울 것 같아 유사하지만 다른 이름으로 붙이도록 하였다. 오랜 장고 끝에 ‘산수문양을 한 책상’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여 <산수문 책상(山水紋 冊床)>이라 하기로 하였다. 이제 상처가 심한 이 나전칠기 상은 <산수문 책상>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 작품은 크기는 상판의 세로는 90cm이며, 가로는 121.1cm이다. 높이는 37cm의 대형 상이다. 손혜원 소장의 작품에 비해 상판의 세로가 약 4.7cm 크며, 가로는 121.1cm로 같고, 높이는 1.5cm 크니 송혜원 소장품 보다 조금 큰 셈이다. 현재 전하는 전성규의 확인된 작품이 두 점밖에 안되지만, 그의 나전칠기 상중에서 가장 큰 것이다. 

     

 
<산수문 책상>의 부분도


상판의 문양은 전통적인 산수화이다. <산수궤>와 유사한 내용을 가지고 있는데, 마치 좌우를 변환하여 구성한 듯한 느낌이 든다. 좌우로 산을 배치하고 사이에 강물이 흐르도록 하였다. 원경, 중경, 근경을 안정된 구도로 배치하였다. 근경에는 두 사람이 집을 향해 언덕을 오르고 있고, 중경에는 집인 듯 정자인듯한 집이 들어서 있다. 이 집이 언덕을 오르는 이들의 목적지로 보인다. 원경으로는 멀리 여러 겹의 산을 중첩하여, 근경에 비해 가는 선으로 은은하게 표현하였다. 

   

 
<산수문 책상>의 부분도


<산수궤>나 <산수문 나전칠 대궐반>에 비해 선이 부드럽고 조선시대 후기에 유행한 전통적인 남종화 산수화에 가깝다. <산수문 책상>이 부드러운 조선조의 산수화를 그리고 있음에 비해, <산수궤>나 <산수문 나전칠 대궐반>은 선이 더욱 날렵해지고 구성도 복잡해진 특징을 보인다. 특히 원경의 산세는 <산수문 책상>에 비해 산세가 드높아지고 중첩된 산의 수도 많아졌다. 이러한 경향은 당시 회화에서도 나타나는데, 이는 당시 한국을 방문하였던 일본인들이 금강산에 매료되어 이런 풍조가 여러 미술 분야에 공통적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산수문 책상> 속 조선조의 취향을 보이는 산수화가 점차 일제강점기에 유행한 금강산과 같은 굴곡이 심한 산으로 변화된 것을 보면, <산수문 책상>이  <산수궤>나 <산수문 나전칠 대궐반>에 비해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런 면에서 <산수문 책상>이 만들어진 시기는 적어도 1937년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제작소의 규모로 보아 이 정도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1년여의 시간이 걸린 것으로 보아 1936년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종합하여 볼 때 <산수문 책상>은 현재 전하는 전성규의 작품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며, 규모로도 가장 큰 작품이다.   

         


전성규 <산수 책상> 화제와 수결 부분


<산무문 책상>의 상판 우측 위에는 한 시 한편이 적혀 있는데, 청대(淸代) 화가 전두(錢杜)의 <산수서법(山水書法)>에서 따온 구절이다. 한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각배는 어느 곳 나그네인지 모르고,          小艇不知何處客  
밝은 달빛만 가득 싣고 강을 건너오네.         載將秋色過江來

한시에 글자의 출입이 있어, 두 번째 구절의 ‘강(江)’자는 그림에 어울리게 ‘계(溪)’자를 변통하여 쓴 글자이다. 그림 속의 강물 위에는 배 한 척이 떠 있는데, 낚시를 드리우고 있다. 조선 조 문인들의 자연친화 사상이 담겨져 있다. 조선조 문인들은 도연명(陶淵明)처럼 귀거래(歸去來)하거나 송(宋)나라 때 은사(隱士)인 임포(林浦)가 매처학자(梅妻鶴子)하듯이 자연 속에 묻혀 살기를 꿈꾸었다. 작품 속의 주인공은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고 싶어 하는 조선 문인의 표상처럼 보인다. 작은 배에 고기는 가득 싣지 못하고, 하릴없이 달빛만 싣고 와도 속세에 대한 부러움이 없다. 자연친화적인 은일사상(隱逸思想)의 집약이라 할 수 있다.
비록 본인이 시를 지은 것은 아니지만 산수 문양을 자신이 구성하였기 때문에 작가는 마치 자신이 그리고 시를 지은 것처럼 구성하였다. 화가가 산수를 그리고 수결(手決)과 화제(畵題)를 하듯이 한시 뒤에 자신의 호와 이름인 ‘수곡(守谷) 전성규(全成圭)’를 집어넣었다. 작가다운 발상이다. 
또한 <산수궤>와 <산수문 나전칠 대궐반>에서는 인장을 그려 넣었는데, <산수문 책상>에서는 수결만 하고 인장은 그려 넣지 않았다. 전성규는 본래 작품을 하며 인장까지 넣을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점차 화가의 경우처럼 구매자들의 요구에 따라 인장을 그려 넣은 듯하다. 점점 조선조의 전통적인 나전칠기의 형식이 다른 양태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6.마무리

전성규는 근대 나전칠기 공예를 구중궁궐이나 벌열 양반층에서만 쓸 수 있었던 고급 공예품에서 개인의 창의성이 들어간 근대 예술품으로 변화 발전시켰다. 그는 나전칠기로 실용적인 가구를 만들어 세상에 보급시키고자 노력한 근대 의식을 가진 실용미술가였다. 
당시 전통 구습의 답습에만 머물러 있었던 다른 작가들과는 달리 그는 나전칠기를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게 하고자 하였다. 나전칠기가 전 세계인이 향유할 수 있는 경쟁력이 충분한 미술품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생각지 않게 찾아온 파리만국장식미술박람회의 입상은 당시 식민지배에 있었던 한국 민족에게는 자랑스러운 쾌거였다. 한국의 대표적인 개인 공예가로 자신의 이름을 달고 국제무대에 도전한 최초의 나전칠기 미술가이기도 하였다.
전성규 이후 많은 공예가들이 자신의 이름을 단 근대적 의미의 공예 작품을 발표하였으며, 이때부터 비로소 우리나라에 본격적인 근대 공예가 싹 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런 면에서 전성규는 과거의 구습을 벗고 근대적 의미의 공예를 이해한 최초의 ‘나전칠기 근대공예가’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끝>
글 황정수 관리자
업데이트 2019.09.21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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