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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전칠기의 세계화를 꿈꾼, 근대 공예가 수곡 전성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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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작품의 세계화를 위해 제자를 양성하다
파리 만국공예미술박람회에서 수상하여 유명해진 전성규는 이후 작품 제작과 함께 후진 양성에 힘을 쏟는다. 나전칠기로 만든 가구의 대량생산에 힘을 쏟았던 전성규는 일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아 실패를 거듭하자, 나전칠기의 발전을 위해서는 후진을 양성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동안 후원해주던 이들을 찾아 모금하여, 1927년 장곡천동(長谷川町, 현 중구 소공동) 106번지에 4년제의 나전실업소(螺鈿實業所)라는 나전기술 교육기관을 설립한다. 

당시 동아일보에 실린 <미박(美博) 수상(受賞)한 전성규씨 나전실업소 설립>이라는 기사를 보면, 그는 나전칠기를 가르치는 교육 기관을 만들어 나전칠기를 세계적인 공예품으로 만들 포부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학원의 규모와 제도도 비교적 체계가 갖추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전 제작품 출품으로 말미암아 일즉 불란서 파리미술공예 박람회에서 상을 받은 시내 삼청동 전성규씨는 이관용씨 외 몇 사람의 후원으로 약 삼만원 동을 준비하여 가지고 나전실습소를 만들고자 운동중이든 바 시내 장곡천동(長谷川町, 현 중구 소공동) 106번지에 실습소를 설치하고 오는 사월 오십일 경부터 학생을 모집하리라는데 모집인원은 약 오십 명이라 하며 응모 자격은 보통학교 졸업생으로 제일년에는 자비, 제이년에는 소득의 반분을 급여, 제3년에는 소득 전부를 급여, 제4년에는 부속기구를 주고 공장까지 빌려주어 영업을 하게 한다는 등 내규가 있다는 바 조선에서는 처음인 만큼 일반의 촉망하는 바도 많다더라.”1)


이 기사에 의 내용 관심을 끄는 것은 교육 과정이다. 보통 나전칠기는 매우 매우기 힘든 기능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보통 일급 장인은 어려서부터 기술을 배운 사람만이 훌륭한 기능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왔다. 그러나 당시에 나전칠기란 분야의 공예는 실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고, 그것을 만드는 기능적인 친밀도가 강하여 뜻이 있는 사람은 어느 정도의 시간과 교육을 받으면 충분히 좋은 기능인이 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전칠기 분야에서 전설화된 전성규의 일생을 말할 때 항상 궁금해 하는 것이 그의 출신에 대한 것이다. 그의 뛰어난 업적 때문에 전승되어 내려오는 이야기는 영웅소설의 영웅만큼 신화적인 의미로 해석된다. 특히 많이 이야기 되는 것이 왕실에 작품을 진상하는 집 안의 자제로 태어나 자연스럽게 나전칠기를 만들었다는 설이나 왕실의 상궁의 양자로 들어가 호화로운 나전칠기를 접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 들은 특별한 근거 없이 나전칠기를 만드는 사람들 사이에 구전되어 온 이야기일 뿐이다. 그만큼 나전칠기는 어려서부터 가까이하여야만 배울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일화이다.

당시 나전칠기를 배우기가 매우 어려웠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모든 기술이 그렇듯이 각 집 안만이 가지고 있는 비밀스러운 기술은 아무에게나 가르쳐주지 않았다. 먹고 살기 힘들었던 시절에 기술은 그들을 지탱해주는 생명수나 다름없었다. 낯선 이에게 자신들만이 가지고 있는 기술을 가르쳐 주는 일은 없었다. 이들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비밀을 아는 것이 기술의 완성이었다. 이를 공개적으로 가르쳐주려 만든 것이 나전실업소였다.   

과정학습비 및 혜택
제1년자비
제2년소득의 반분을 급여
제3년소득의 전부를 급여
제4년부속기구를 주고 공장까지 빌려줌
<나전실업소 과정표>

전성규가 세운 나전실업소의 과정을 보면 한 명의 나전칠기 기술자를 기르기 위해 얼마간의 시간이 걸리는지를 알 수 있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어린 학생 한명을 받아들여 열심히 일 년 동안 기본 기술을 가르치면 나전칠기를 만드는 본 과정에 투입할 수 있는 제법 행세하는 기술자로서 면모를 갖추게 된다. 이때부터 자신이 만든 작품을 상품화 할 수 있는 기술자로서 대접을 받게 된다. 2년차부터 월급을 받을 수 있었고, 기술을 배운지 3년이 되면 자신이 만든 작품을 판매한 돈은 자신이 가져가는 전문 작가로 대접을 받게 된다. 각각의 개인차가 있긴 하지만 보통 나전칠기를 배우는 시간은 3년여의 시간이 걸렸다. 3년이 지난 후부터 각각의 능력에 따라 새로운 도안을 개발하여 작품을 만들어 내면 진정한 예술가의 반열에 들게 된다.


경성인 원조 청패세공미술가 일동(뒷줄 왼쪽 끝 전성규) 


훌륭한 나전칠기 장인을 양성하기 위해 설립된 나전실업소는 후진 양성과 제품 제작에 힘썼으나 쌓여가는 재정의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닿고 말았다. 세계에 드날렸던 전성규의 나전칠기에 대한 꿈은 이렇게 사라지는 아픔을 맞는 듯하였다. 한 동안 상심하였던 전성규는 삼청동 작업실로 돌아와 다시 작업에 몰두한다.  
이 후 그는 1934년과 1937년 조선미술전람회에 나전칠기 작품을 출품한다. 1934년에는 <나전 벼루집(螺鈿硯筥)>을 출품하였으며, 1937년에는<산수 책상(山水机)>을 출품하였다. 그가 작품을 출품한 것은 상을 받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그는 조선미술전람회의 심사위원을 할 만한 자격이 있었지만, 일본인들의 자폐적 운영 때문에 심사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1932년에 처음 조선미술전람회에 공예부분이 추가되자 3년 후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보여주기 위하여 출품하기를 결심한다. 혹은 재기를 위한 출품이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1937년에 옷 칠로 유명한 평안북도 태천군 칠생산조합의 후원으로 <태천칠공예소(泰川漆工藝所)>가 설립된다. 공예소의 교장으로 전성규가 부임한다. 그는 나전칠기의 후진 양성을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더욱이 개인적으로 창설했던 <나전실업소>의 실패를 거울삼아 훌륭한 칠공예소를 만들기 위해 밤낮으로 일한다. 1939년에는 태천칠공예소 학생 32명을 이끌고 경성으로 가 견학을 하고 학생들에게 발전된 경성을 보여주며 학습의 의욕을 돋우고자 노력을 하기도 한다.2)
 후진을 위해 몸을 돌보지 않고 애쓰던 전성규는 1940년 아쉽게도 칠공예소의 발전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만다. 태천칠공예소는 그의 제자인 송주안이 교장 직을 이어 받는다.  

전성규는 고려, 조선을 거치며 전통적인 방식을 답습하던 나전칠기를 일본에서 공부한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도구를 받아들여 더 한층 발전시킨 작가이다. 그는 본래 주름질과 끊음질 기법에 능하였던 장인으로 조선조 전통을 바탕에 두고 새로운 것을 만들려 한 작가였다. 새로운 방법으로 시계 공장에서 사용하는 서구식 실톱을 사용하여 자개를 여러 장 포개어 여러 개의 동일한 무늬를 단번에 썰어 내거나 무늬복사용지를 사용하는 등 작업능률을 향상시킴으로써 전통기법을 개선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특히, 후진 양성에 역점을 두었던 그의 노력은 교육적인 면에서 볼 때 높이 평가될 업적이다. 그에게 배운 대표적 장인으로는 김봉룡(金奉龍, 1903-1994)과 심부길(沈富吉, 1906-1996), 송주안(宋周安, 1901-1981) 등이 있다. 이 후의 나전칠기 장인 중 상당수가 이들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나전칠기 발전에 끼친 전성규의 영향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계속)





==============
1) 「美博 受賞한 全成圭氏 螺鈿實業所 設立」,『동아일보』, 1927년 4월 2일자.
2) 
동아일보』, 1939년 11월 18일자.
글 황정수 관리자
업데이트 2019.05.22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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