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측메뉴타이틀
  • 파리가 사랑한 동양미술관
  • 최열의 그림읽기
  • 영화 속 미술관
  • 조은정의 세계미술관 산책
  • 미술사 속 숨은 이야기
  • 경성미술지도-1930년대
  • 김영복의 서예이야기: 조선의 글씨
  • 한국미술 명작스크랩
  • 도전! C여사의 한국미술 책읽기
  • 왕릉을 찾아서
  • 시의도-시와 그림
  • 근대의 고미술품 수장가
타이틀
  • 나전칠기의 세계화를 꿈꾼, 근대 공예가 수곡 전성규 1
  • 3232      
1. 나전칠기를 근대화한 공예가 전성규
1925년 5월에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만국미술공예박람회에서는 당시 식민지의 설움을 겪고 있었던 한국인의 작품이 은상과 동상을 휩쓸어 화제가 되었다. 이들은 일본제국주의 식민지하에서 자신들의 전통 공예의 맥을 잇고 있던 한국의 나전칠기 공예가인 수곡(守谷) 전성규(全成圭, 1880-1940)와 그의 제자 일사(一沙) 김봉룡(金奉龍, 1903-1994)이었다. 이들의 작품은 나전(螺鈿)과 칠(漆)이라는 재료의 특수성과 정성스럽게 만든 작품의 화려함으로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들의 수상은 식민지의 설움에 가슴을 조아리고 살았던 한국인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쾌거였다. 10여년 후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받고 금의환향하게 되기 이미 10여 년 전의 일이었다.  

   “청패(靑貝)1)와 고투(苦鬪) 삼십여년(三十餘年)!” 

이 짧은 몇 마디는 그동안 조선조의 구태(舊態)한 유물로만 생각되었던 나전칠기를 세계적 ‘인기아(人氣兒)’로 만든 장인인 전성규의 삶을 한 줄로 압축한 말이다. 그만큼 그동안 살아온 그의 일생은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배우기도 어려웠고, 최고의 경지에 오르기도 힘들었다. 더구나 세계 굴지의 박람회에 출품하여 상을 받게 되기까지 그의 삶은 고투(苦鬪)의 연속이었다. 대한제국이란 국호로 바뀐 조국은 도와 줄 힘이 없었고, 점령자인 일본은 도와줄 마음이 없었다. 한국, 일본 어느 쪽도 그의 노력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홀로 자신의 재능만을 믿고 세상에 뛰어들었다.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이루어 낸 그의 박람회 수상은 황량한 사막에 내린 단비와 같은 것이었다.

전성규는 상을 받은 이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는 하였지만, 그의 힘든 삶의 역정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새로운 목표를 향해 꿈을 펼치면서, 기대에 따르지 않는 세상의 무관심에 더욱 힘든 삶을 지탱하며 지낸다. 그는 나전칠기의 대량화와 일상화 그리고 제자들의 양성 등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이를 이루어 내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한다. 무엇이 그를 ‘나전칠기’라는 공예에 그토록 몰두하게 하였을까? 본고에서는 조선의 몰락과 함께 쇄락해가던 나전칠기에 새로운 힘을 불어 넣어, 근대 공예로서의 발전 가능성을 보여준 장인 전성규의 삶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전성규는 조선조의 전통 공예인 나전칠기의 전통을 전수한 대표적인 ‘마지막 나전칠기 장인(匠人)’으로 평가 받는다. 그러나 조선 공예의 마지막 장인이라기보다는 새로운 나전칠기의 지평을 개척한 ‘나전칠기의 중시조(中始祖)’라 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더 나아가 나전칠기를 개인의 창조적 정신으로 부흥시킨 ‘근대 나전칠기 공예의 개척자’라 하는 것이 격에 맞을 듯하다. 이런 찬사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전성규의 모습

  
나전칠기 공예가 수곡 전성규2)의 출신이나 어린 시절에 대해서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일설에 의하면 서울 출신으로 상궁(尙宮)의 양 아들로 들어가 궁궐 출입이 비교적 자유로웠던 관계로 궁중의 공예품을 어려서부터 가까이에서 접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러한 설은 명확한 자료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구전에 의해 전해지는 것을 정리한 것일 뿐이다. 좀 더 명확한 자료의 발굴이 필요하다. 이후 29세 되던 해까지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 아쉽게도 젊은 시절의 행적은 알기 어렵게 되었다. 전하는 바를 정리하면 그의 본관은 정선(旌善)이며, 출신은 서울이라고 알려져 있다. 호는 ‘수곡(守谷)’이라 하였는데, 자신이 살았던 지명을 쓴 것으로 보이나 어느 곳인지는 분명치 않다.  
 
전성규가 나전칠기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29세(1918년) 때의 일이다. 당시 일부 개화의 뜻을 품은 선각지사들은 어떤 것이든지 ‘고전적인 조선색(朝鮮色)’을 세계에 자랑하여 보겠다는 눈물겨운 작업을 하고 있었다. 전성규 역시 이러한 당대 풍조의 선두에 서서 할 일을 모색하던 중에, 우연히 당시에는 접하기 어려웠던 나전칠기를 우연한 기회에 보고, 이것을 대대적으로 만들어 외국에 수출하겠다는 큰 뜻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나전칠기를 만드는 비재(秘才)를 가진 사람으로는 한국인 중에서 통영에 사는 엄성봉(嚴成奉)이 제일 유명하였는데, 그의 솜씨를 이어 받은 장인도 그의 제자인 엄항주(嚴恒柱) 등 6인 밖에 없었다. 엄성봉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오직 이들 6인이 낙랑시대부터 오랜 시간을 거치며 고려 시대까지 별별 하대를 받아왔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거의 자취를 감추다시피 한 나전칠기의 생명을 겨우 이들만이 계승하고 있었다. 조선 봉건시대의 공예 예술의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나전칠기 수공업 또한 학대 멸시를 받으면서도 몇 사람만이 자기들끼리 비밀리에 기술을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엄항주 등 6인 역시 다른 사람에게 그 기술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던 것을 1907년 당시 인천의 통상(通商) 사무를 맡아보던 감리서의 기관장인 감리(監理:현 세관장)로 있던 하상기(河相驥)3)가 진상하여 온 나전칠기를 보고 크게 느낀 바가 있었다. 천인(賤人) 출신으로 사업 수완이 좋은 그는 통영에서 활동하던 엄항주 등 6인의 장공(匠工)을 강제로 끌어 올려서, 서울의 삼청동에 작업장을 만들고 진상할 나전칠기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나전칠기에 매혹된 전성규는 삼청동 공장의 소문을 듣고 직접 나전칠기의 제조법을 배우려 하였으나, 6인의 장공들은 가르쳐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절대로 가르쳐 줄 수 없다며 거절하고, 끝내는 옆에 얼씬도 못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공장 부근에만 가도 폭언과 욕설, 폭행까지 한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전성규는 끝까지 그 뜻을 굽히지 않고 때로는 공장 부근에서 노는 체 하며 눈치로 넘겨 배우기도 하고, 때로는 창문을 뚫고 보며 배우는 등 피눈물 나는 노력을 하였다. 가시밭길을 걸으며 배운지 1년 만에 그는 자개 껍질을 닦고, 깎고, 오리고, 박는 법과 칠하는 법을 모조리 배웠다. 전성규에게는 그들에게 배운 기술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그들이 갖지 못한 그들보다 탁월한 다른 재주가 있었다. 나전칠기 제작의 바탕이 되는 탁월한 도안(圖案) 능력이었다. 그의 다양하고 다채로운 도안 재주는 그들보다 몇 곱절 진보한 바 있었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다양하면서도 창조적인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던 중 마침 전성규에게 결정적인 기회가 왔다. 의병과 내통하였다는 의혹을 사고 있었던 하상기의 개인적인 문제로 삼청동 공장의 경영이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전성규는 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공장을 인수한다. 그동안 자신을 멸시하던 전통 장인 6인은 이제 거꾸로 전성규 밑에서 일하게 되는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성규는 이 들과는 다른 대범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이들을 포용하여 삼청동 작업장을 더욱 굳건한 작업장으로 만든다. 이들의 기술과 자신의 도안 실력을 바탕으로 상품을 개발하여 그동안 보지 못했던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내는 성과를 이룬다. 

특히 그는 새로운 작품 창작뿐만 아니라 대량 생산에도 관심이 많아 전 국민이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나전칠기의 개발에 힘을 기울였다. 호화로운 감상용 작품이 아니라 실생활에 유용한 나전칠기 가구의 상품화를 꾀하였다. 실용적인 가구의 대량생산이라는 개념은 당시로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개화된 근대 의식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당시 전 한국의 집집에서 자개를 소재로 만든 장롱, 책상, 상 등이 호사스럽게 빛나는 것은 모두 이러한 전성규의 피눈물 나는 노력, 굳은 의지와 원대한 포부에서 나온 것이었다.

삼청동 작업장이 자리를 잡자 전성규는 제자들의 양성이 필요함을 느껴 여러 제자들을 삼청동으로 불러들이기 시작한다. 1919년에 훗날 명성을 떨치게 되는 김복룡을 제자로 두기 시작하여 송주안, 심부길 등 재능 있는 제자들을 모아 기술을 전수시킨다. 이들을 가르치며 수공업 수준을 넘어서는 새로운 규모의 사업으로 나전칠기의 대대적 제조를 목적으로 하는 대규모 공장 경영을 계획하기도 하고 자영 공장을 확장하기도 한다. 또한 나전칠기의 본 고장인 통영에 대규모 공장을 설치하여 보기도 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여 실패를 하고 말았다. 

전성규는 새로운 사업의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1920년 김복룡, 송주안 등 제자들과 함께 일본으로 가서 도야마현(富山縣) 다마오카시(高岡市)에 있는 조선나전사(朝鮮螺鈿社)에서 일을 한다. 당시 조선나전사는 한국에서 나는 청패(靑貝)를 사용하여 일본인 취향에 맞는 나전칠기 작품을 만드는 회사였다. 그는 이곳에서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환경을 마주하게 된다. 나전칠기의 종주국을 자부했던 한국보다 훨씬 뛰어난 작업 환경과 과학적 기능이 추가된 새로운 도구의 사용이 그것이었다. 

특히 시계를 만드는 공장에서 사용하는 세공용 줄 톱의 발견은 그에게 새로운 세계를 펼쳐 보여주었다. 그동안 전성규 공방에서 사용하던 도구는 전통적인 조선의 기구로 세밀한 작업을 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금속 세공용 줄 톱은 전통적인 톱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세밀한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이와 아울러 그곳에서 새로 배운 나전무늬를 도안화 하는 방법도 그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는 금속 세공용 실톱의 사용법과 새로 배운 도안 방식이 자개 무늬 제작과 주름질 기법에 혁신을 가져와 한국 나전칠기 공예를 한 층 발전시킬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일본에서 돌아온 전성규는 새로운 도구를 사용하여 이전에 한국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느낌의 작품을 만들어내며 다시 한 번 각광(脚光)을 받게 된다. 그의 작품은 디자인이 새로웠을 뿐 만 아니라, 자개의 세공이 눈부시리만큼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그의 정교한 기술은 그의 창조적 상상력이 더하여 한층 빼어난 예술품을 만들며 그의 희망찬 가슴을 채워주었다.(계속)




===========
1)  나전에 사용된 조개껍질을 순 우리말로는 ‘자개’라 하였고, 한자어로는 ‘청패(靑貝)’라 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주로 ‘청패’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였다. 
2) 
 동아일보 조간 1940년 1월 9일자에 실린 특집 기사 <一意精進의 今日! 螺鈿漆器를 工藝化한 全成圭氏>는 전성규의 장남 전창한의 증언을 정리한 기사이다. 이제껏 나온 전성규의 일생에 관한 기억 중 비교적 상세하여 이를 중심으로 전성규의 삶을 재구성한다.
3) 
하상기(河相驥)는 생졸년 미상. 조선 말기 관리. 본관은 진양(晉陽)이다. 부인은 여성으로서 최초의 학사 학위 취득자이자 여성운동가인 하난사(河蘭史)이다. 하상기는 원래 서울의 천인(賤人)이었으나, 1899년에 경무관을 지내던 중 인천감리(仁川監理) 겸 인천부윤(兼仁川府尹)에 임용되었다. 1902년에 경무청경무국장에 임용되었다가 다시 인천감리 겸 인천부윤이 되었다. 1903년에 고종의 교지(敎旨)를 받고 난 이후 아들인 하구용(河九鏞)이 사육신의 한 사람인 하위지(河緯地)의 제사를 받들어 모시는 봉사손(奉祀孫)이 되었다. 하지만 이 결정을 두고 하상기가 하위지와의 관계를 꾸며낸 것이라는 상소가 올라왔다. 1905년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임용되었고, 같은 해 일본 주재 공사관(公使館)으로 임명되었다. 1906년에 농상공부공무국장(農商工部工務局長)으로 자리를 옮겼다. 같은 해에 의병(義兵)과 내통하였다는 죄로 통감부에 쫓겨나서 미국으로 도주하였다. 
글 황정수 관리자
업데이트 2019.03.23 08:28

  

SNS 댓글

최근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