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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방과 카페 1: 가배차 또는 양탕국
  • 1415      
우리나라 근대의 다방과 카페는 도시의 환상 공간이었다. 때로 다방과 카페는 별천지의 유토피아의 공간이었으며, 현실이 괴로울수록 빠져드는 환상이기도 했다. 한편 다방과 까페는 문인, 화가, 예술가 등이 교유하는 장소이자 ‘모던 뽀이’, ‘모던 걸’ 들의 집합소였으며 미술전람회가 개최되는 등 문화 활동의 장이 되기도 했다.


<다방풍경>, 『조선일보』, 1934. 2. 9


다방 낙랑 파라에서 서양화가 ‘길진섭 소품전’이 개최됨을 알리는 신문기사, 『동아일보』, 1936. 3. 15


근대이전의 사회 곧 전통사회에서 생활공간으로서의 집과 별도의 만남의 장소 또는 담소의 장소는 따로 있지 않았다. 남성들만의 공간인 양반가의 사랑방, 사랑채가 공적인 활동을 하는 장소가 되었다. 근대에 들어 부농들도 부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사랑채를 짓기 시작했으며, 1920년대까지 농촌 지역의 청년회가 지역 유지의 사랑채를 회관대신 사용했던 것도 이러한 공간구조가 당시까지 남아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네덜란드계 미국인화가 휴버트 보스의 <서울풍경>(1899). 미국공사관 언덕에서 경복궁과 당주동, 신문로 일대를 바라보며 그린 그림이다.


가정과 직장 또는 가정과 교제의 장 등 공과 사의 공간이 구분되지 않은 것은 전근대사회의 일반적 경향이다. 서구에서도 개인들이 모여서 교류하는 공간은 근대 이후에 나타났다. 17-18세기에 들어서 개인의 자유에 기초한 새로운 유형의 회합이 유행하면서 귀족의 살롱이 아니라 선술집, 카페 등과 같은 장소를 이용하게 되었다. 커피는 저속한 선술집에서 벗어난 선량한 남자 동료들 간의 사회성을 이루게 해주는 새로운 음료를 상징했다. 특히 공공의 장소로서 카페는 파리에서 출발하여 프랑스 대혁명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혁명 이후 각 계층들은 취향에 맞는 카페에 모여들게 되었다. 예술가들에게 카페는 새로운 예술운동의 중심이었고, 노동자들에게는 정치적 성장의 기반이기도 했으며 오락과 모임을 위한 장소로 기능하였다.


『버튼 홈즈 여행기』(1919)에 소개된 러시아 공사관과 러시안 아치 


<대한제국 황실가족 사진>. 왼쪽부터 영친왕, 순종, 고종황제, 순종효황후, 덕혜옹주. 


최초로 미국에 파견된 보빙사(1883). 앉아 있는 사람들 중 왼쪽부터 로웰, 전권부대신 홍영식, 전군대신 민영익, 종사관 서광범, 중국인 우리탕(吳禮堂)이다. 천문학자, 수학자, 사업가인 로웰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1886)을 저술하였다.


우리나라에 커피가 언제 들어왔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공식 기록에 의하면 1896년 고종이 아관파천 당시 러시아 공사관에서 커피를 처음 마신 후 커피 애호가가 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미국인 퍼시벌 로웰이 1884년 궁중에서 “조선의 최신유행품인 커피”를 대접 받았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면 1880년 초반에 이미 커피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대불호텔. 인천항의 대표적인 숙박기관으로 초기에 인천으로 들어오는 외국인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최초의 서구식 호텔이다.


손탁호텔 전경


손탁호텔의 식당 또는 카페


개항 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커피를 판 곳은 일본인 호리 리키타로가 1885년 또는 1888년에 인천에 세운 대불호텔로 추정되지만 기록이 확인되지는 않는다. 커피숍의 존재가 확인되는 것은 손탁호텔이다. 프랑스와 독일의 접경지역 알사스 지역 출신 앙투아넷 손탁(Antoinett Sontagg, 孫澤: 1854-1925)은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처남의 처형으로 1885년 베베르를 따라 내한하여 25년간 우리나라에서 생활했다. 뛰어난 어학능력과 사교술로 조선 사교계의 중심이 된 손탁은 궁내부에서 외국인 접대업무를 맡으며 고종과 명성황후와 가깝게 지내게 되었고 1895년 서울 정동의 한옥 한 채를 하사받았다. 이를 기반으로 1898년에 ‘손탁빈관’, 1902년에 손탁호텔을 지어서 호텔식 다방을 선보였다. 


<대경성부대관>의 ‘정동 일대’ 부분


손탁은 1898년 고종으로부터 양관(洋館)을 하사받아 손탁빈관으로 영업을 개시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방 다섯 개의 양관은 호텔 영업하기에는 너무 좁아 손탁은 1895년에 이미 하사받은 정동의 사저 1,184평을 철거하고 1902년 그 자리에 2층 양관을 지은 것이 손탁호텔이다. 1918년 문을 닫은 후 이화학당에서 사들여 기숙사로 이용하다가 1923년에 헐렸다.(정동교회 뒤쪽 현 이화여고 구내에 터가 남아있다.) 손탁호텔은 당시 서울에서 외교관, 외국 방문객들이 자주 드나들던 곳으로 서양문물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었다. 


<경성정밀지도>(1933)의 ‘정동 일대’ 부분


1907년 이후에는 일본인들이 이른바 ‘끽다점(喫茶店)’을 내기 시작했다. 일본인 구보다(久保田金次郞)가 1907년 4월 아오키도(靑木堂) 경성 지점을 열었다. 아오키도는 일층에서는 양주, 2층에서는 차와 식사를 겸할 수 있는 구조로 1914년 조선호텔이 생기기 전까지 최고급 식당이자 찻집으로 장안의 명물이었다. 1909년 11월 1일부터는 남대문역 끽다점이 영업을 시작했다. 1914년에는 아오키도 경성지점이 탑골 공원 안에 탑다원(塔茶園-카페 파고다)이라는 끽다점을 내기도 했다.


아오키도(靑木堂) 경성지점의 식당. 과자와 차를 팔았다.



조선은행(현 한국은행) 앞에서 남대문통을 바라 본 사진(사진엽서). 왼쪽 건물에 ‘靑木堂’, ‘AOKIDO’라는 글자가 보인다.


커피는 처음에 ‘가배차(珂琲茶)’나 ‘가비차(加比茶)’로 음역되었고, ‘양탕(洋湯)국’으로 불리기도 했다. 호텔 커피숍, 양식이나 과자와 함께 차를 판 가게들과 달리 커피와 차를 전문으로 팔고 고전음악이 흐르며 실내 장식에도 유의한 다방들은 1920년대에 들어서 나타난다. 1923년경 일본인이 본정 3정목(현 충무로 3가)에 문을 연 ‘후다미(二見)’를 필두로 본정 2정목(충무로 2가)에는 ‘금강산’이 들어섰다. 



* 이글은 아래 글에 의거하여 서술하였다.
장유정, 『다방과 카페, 모던보이의 아지트』, 살림지식총서 342, 살림, 2008. 10
이기훈, 「‘다방’, 그 근대성의 역정」, 『문화과학』 2012년 가을호(71호), 2012. 9. 1, 223-239쪽.


김상엽 관리자
업데이트 2017.10.23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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