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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촌과 남촌: 조용만의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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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의 경성을 개관하기 위하여 조용만(趙容萬: 1909-1995) 선생의 『울밑에 선 봉선화야- 30년대 문화계 산책: 남기고 싶은 이야기』(범양사출판부, 1985)에 수록된 '서울의 풍물' 가운데 일부를 전재하고자 한다. [한국근대의 미술품 수장가] 24회(http://www.koreanart21.com/column/collector/view?id=1211&page=5 2011.05.23)에도 소개한 바 있지만 이 당시의 경성을 이해하는 데에 이만한 글이 없어 다시 소개한다.

조용만 선생은 1909년 3월 10일에 한성 중부 장통방 판교동 49통 10호(나중에 경성부 장사동 22번지로 바뀜)에서 출생하여 경성제일고보와 경성제대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1933년에  이효석⋅이태준⋅정지용⋅이상 등과 함께 구인회(九人會)를 결성하여 활동하였으며, 『매일신보』 학예부장, 『국도신문』과 『코리아타임즈』의 주필, 고려대 교수를 역임하였다. 노년에도 정확한 기억력을 유지하여 연구자들로부터 "조용만 선생의 기억은 사적(史的) 가치가 있다"는 찬사를 들었다. 저서로 『문학개론』, 『북경의 기억』, 『고향에 돌아와도』, 『구인회 만들 무렵』, 『경성야화』 등이 있다.


남산에서 바라 본 경성시가 전경. 1930년대.


미쓰코시(三越) 백화점(현 신세계 백화점)에서 바라 본 조선은행 앞 광장(鮮銀前廣場).
조선은행 앞 광장은 일본의 조선통치 성공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었다.


1930년 1월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자리에 삼월(三越) 백화점이 낙성, 개점되어 서울 사람이 새 명물이 생겼다고 떠들썩했다. 5층으로 된 근대식 큰 백화점으로 일용 백화가 없는 것이 없이 구비되어 북촌에 사는 조선 사람들을 고객으로 많이 끌었다. 그 때 북촌에는 백화점이 없었고, 화신백화점은 그로부터 훨씬 뒤인 37년께 개점되었다.


경성 미쓰코시 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1930년 신관 개점)


조지야(丁字屋) 백화점(남대문통 2정목. 현 명동 롯데 영플라자 자리, 1939-1945년 경)


여기서 설명해야 할 것은 북촌(北村)과 남촌(南村)이다. 1905년 일본이 보호조약으로 한국을 묵어놓은 다음 초대 통감에 이등박문(伊藤博文)가 취임하여 남산 중턱에 통감부를 설치했다. 그리고 남산을 중심으로 그 일대를 일본 사람의 거류지로 만들고 거기에 헌병 사령부를 짓고, 조선은행을 짓고, 상업회의소를 만들고, 경성 전기회사를 짓고, 백화점으로 삼월(三越)⋅정자옥(丁字屋)⋅삼중정(三中井)⋅평전(平田) 등을 개점하게 해 저희들의 거류지를 번창하게 만들었다. 지금의 충무로 거리는 길 폭이 좁았으므로 거마(車馬)를 못 다니게 해 보행자는 좌우편으로 마음대로 다니면서 물건을 사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거리를 본정통(本町通)이라고 불러 서울의 메인 스트리트 행세를 하게 하였다.


혼마치(本町: 현 충무로) 1정목 입구. 왼쪽의 붉은 색 벽돌과 흰색 벽돌로 치장된 건물이 경성우편국이다.


혼마치 거리 풍경.


혼마치 1정목의 야경.


본정통 다음으로 지금의 을지로를 황금정(黃金町)이라 해서 일정목(一町目)부터 육정목(六町目)까지 있었는데, 경성(京城)운동장(지금의 서울운동장)은 황금정 6정목에 있었다.


황금정(黃金町, 현 을지로) 거리 풍경. 1940년경.


청계천은 넓은 개천이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복개되어 흔적이 없어졌지만 광화문 네거리 동아일보사 아래 모교(毛橋: 毛廛橋)로부터 시작되어 종로 네거리의 광교(廣橋), 더 내려와서 장교(長橋), 그리고 삼일빌딩 아래에 있는 수표교(水標橋), 그 아래가 종로 3가의 관수교(觀水橋), 화리껴다리, 효경다리, 배다리, 마전다리, 첫다리 등을 거쳐 끝으로 오간수(五間水) 다리로 해서 왕십리로 빠진다. 이 다리 이름들은 지금 기억이 아리송해 틀린 것이 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이 청계천이 서울의 남북을 갈라 놓는 구획선 노릇을 했다.


청계천 수표교의 이전하기 전 모습. 서울의 남북 구획선은 청계천이었다. 


일제시기 경성의 조선인 마을. 


청계천 북쪽이 조선 사람이 많이 사는 이른바 북촌이 되고, 그 남쪽이 일본사람이 많이 사는 남촌이 된 것이다. 북촌의 중심은 종로고 남촌의 중심은 본정인데, 해방 전까지도 남촌과 북촌의 차이는 완연하였다. 남촌에 들어서면 거리가 번화하고 활기에 차 있었지만 북촌은 죽은 듯이 고요하고 모든 것이 잠자는 듯하였다.


1920년대 후반의 종로 2가. 오른쪽 건물이 YMCA이다. 남촌이 개발되는 동안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던 종로에
변화의 물결이 닥친 것은 총독부 청사가 경복궁 자리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1920년대 후반부터 2-3층의
양식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하였고, 인도와 차도도 구분되었다. 그러나 차도는 여전히 포장되지 않았고
가로수나 가로등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어려서 서울 구경을 한다고 남산에 올라가 내려다보면 북촌은 종로에 YMCA의 4층 붉은 벽돌집이 하나 덩그렇게 서 있을 뿐이고 나머지는 푸르뎅뎅한 기와지붕과 누런 초가지붕뿐이었는데, 남촌은 커다란 양옥집들이 수없이 우뚝우뚝 서 있어서 신시가지같이 보였었다.


종로 2가의 화신백화점(현 삼성종로타워 자리, 1937년 11월 11일 개점.)


30년대 까지만 해도 종로에는 큰 가게가 화신상회뿐이었고, 그 아래로 금은방들이 늘어섰고, 화신상회 이외에 인사동 모퉁이에 있는 동아부인상회가 제일 큰 백화점 노릇을 하였다. 그 밖에 대창 양화점⋅한경선 양화점이 큰 구둣방이고, 김윤면 포목점이니, 구정(九鼎)상회 같은 것이 큰 포목점이어서 이것들이 종로 상가를 꾸미고 있었다.


1930년 경의 탑골공원(현 종로구 종로 2가 38-1)


이렇게 북촌에는 가게도 많지 않고 값도 비싸 젊은 인텔리 남녀나 부유한 가정부인들은 으레 쇼핑을 하려면 남촌으로 나갔다. 전차를 타고 왕복해도 전차 값이 빠지고 물건이 훨씬 좋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정자옥⋅삼월⋅삼중정 같은 데는 훌륭한 식당이 있어서 맛있는 음식을 값싸게 먹을 수 있으므로 손님이 많이 몰렸다. 어떤 때 이런 백화점이나 백화점 식당에 들러보면 대부분 조선 사람이었다.


1940년대의 종로 야시(夜市). 1916년 시작된 종로 야시는 1940년대까지 거의 매일 열렸다. 자기 점포를
갖지 못한 영세상인과 싼값에 일용품을 구하려는 서민들이 밤이면 몰려들었다. 1935년 종로에 가로등이
설치되면서 야시장의 풍경도 한층 다채로워졌다.

 
종로 상가에서 자랑할 것은 야시(夜市)뿐이었다. 야시란 것은 종로 화신상회 건너편에서부터 시작해 종로 3가까지 이르는 큰길 왼쪽에다가 밤에 가게를 벌여놓고 물건을 파는 것이다. 포장으로 천막을 치고 땅에는 돗자리를 깔고 가스 등불을 켜서 불을 밝힌 다음 돗자리에 물건을 벌여 놓고 파는 것이다. 물건은 일용 잡화로 우리 네 생활에 쓰이는 모든 것이 다 있었다. 이것을 큰소리로 외치면서 손님을 부르는데, 여름밤에는 소풍 겸 사람들이 많이 모여든다. 어떤 사람은 서울 여름밤의 풍물시(風物詩)라고도 불렀는데 서울 밤의 명물임에 틀림없었다.


김상엽 관리자
업데이트 2017.06.25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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