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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운 동행: 이상과 구본웅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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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뽀이 들의 아지트 낙랑파라 - 동경미술대학 도안과를 나온 이순석이 1931년에 개업한 다방 낙랑파라.
장곡천정(長谷川町: 소공동) 초입에 위치했다.



『조선중앙일보』(1939.2.23)의 「제비 하(下)」에 실린 박태원의 그림.
제비다방에 ‘갑바머리’ 박태원과 이상이 마주앉아 담소하고 있다.
갑바머리는 그때 일본에서 유행하던 앞머리를 내려깎는 스타일이었는데,
당시 일본이 낳은 세계적 화가인 후지다 쓰구하루(藤田嗣治: 1886-1968)가
이런 머리를 해서 동경의 번화가를 활보한 이후 젊은이들 사이에 크게 유행하였다.



<대경성부대관> 소공동 부분 


구본웅은 ‘낙랑파라’와 ‘제비다방’에 들러 예술인들과 담소를 나누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1933년 4월 오늘날 유네스코 회관 근처에 있는 건물 2층을 빌려 경성정판사(京城精版社)를 개업했고 가까운 거리에 있는 소공동에 골동품 갤러리 우고당(友古堂)을 열었다. 경성정판사에서는 주로 극장 포스터를 디자인하고 인쇄해주는 일을 했으며 우고당에서는 미술품을 감정하고 좋은 골동품을 발견했을 때 조선인 수집가를 연결해 주는 역할을 했다. 이는 장애를 극복하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이며 개방적으로 살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또한 아버지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하려는 몸부림이었다.


1938년 소공동에 개업한 다방 나전구(羅甸區)와 우고당 광고 


우고당 3층에 아틀리에를 마련했는데 교통이 좋아서 낮에는 친구들의 집합소가 되었다. 시인 고은은 『이상 평전』에서 구본웅의 본가와 그의 일면을 이렇게 표현했다.

‘낙랑파라’에서 만나는 일을 제외하면 그들이 매일 만나는 곳은 다동에 있는 구본웅가의 광활한 대가(大家) 사랑의 화실이었다. 그 화실 겸 거실은 당시의 시인, 작가, 비평가, 화가 심지어 영화감독까지 모여들어서 문예살롱의 기분이 짙었으며 그 본웅가(家)를 다옥정(多玉亭)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본웅은 화가답게 그의 꼽추에도 불구하고 서구적인 멋 가락을 잘 나타내어서 다옥정(茶屋町) 기생들도 ‘꼽추 멋쟁이’, ‘꼽추 도련님’이라는 별명으로 수군거릴 정도였다.

1935년 3월 3일 13시 구본웅은 우고당 작업실로 이상을 불렀다. 원래 이상은 오래 전부터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수없이 졸랐다. 그러나 구본웅은 남의 초상화 그리는 일은 철저히 거절했다. 이번에도 그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권태와 조소와 자학과 반항과 분노와 초탈을 폭포줄기처럼 쏟아내는 젊은이를 나타내려 한다고 작품의도를 설명했다. 구본웅은 그에게 다음날부터 매일 모델로 나와 줄 것을 부탁했다. 이상은 그 작품을 자기에게 주는 것을 조건으로 응했다. 


구본웅, <친구의 초상>, 1935. 이상이 모델이다.



<친구의 초상>을 그리고 있는 구본웅, 홍성찬 화백 


마침내 구본웅은 이상의 눈매를 더욱 날카롭게 하고 파이프를 비스듬히 물고 있는 얼굴을 더욱 창백하게 그림으로써 젊은 지성인의 반항적이고 괴팍한 이미지를 포착했다. 구본웅은 격렬한 터치와 어두운 톤이 지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구성적 의지를 표출하려고 노력했다. 작품을 완성한 구본웅은 인력거에 완성된 <우인상(友人像: 친구의 초상)>을 싣고 제비다방으로 갔다. 제비다방에 걸려 있던 이상의 <자화상>과 구본웅의 <나부>와 <정물>에 <우인상>이 더해졌다.


<대경성부대관> 다옥정(茶屋町: 현 종로구 다동) 부분



이상의 벗들.
왼쪽부터 수필가 김소운, 화가 이승만, 구보 박태원, 소설가 정인택. 1939년의 모습.


이상과 변동림은 1936년 6월 친구들의 축복 속에 결혼식을 올렸고, 그때 다동 72번지에 독립해 살고 있던 구본웅의 집에서 50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다동 33번지에 지금의 신혼집을 마련했다. 이때 변동림은 구본웅의 큰아들의 가정교사 일을 하기도 했다. 이것이 마지막 동행이었다. 그 다음해 이상이 일본 도쿄에서 숨지자 변동림이 이를 수습해 국내에 들여왔다. 이상의 마지막 길에 동행한 것은 변동림이었다. 

그 동행의 후일담은 꽤나 씁쓸하다. 이상이 죽고 나서 몇 해 지나지 않아 변동림은 이번엔 유부남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 1913-1974) 화백과 재혼하려 하자 변동림의 이복언니 변동숙은 극력 반대했다. 본부인이 있는 곳에 첩살이를 하는 꼴이거나 본부인을 쫓아내는 악행을 저지르는 것 아니냐며 변동림의 머리채를 잡아 뒤흔들 정도로 그들의 혼인을 극력 반대했다. 이에 흥분한 변동림은 변씨 가문과 인연을 끊겠다며 김향안(金鄕岸)으로 이름을 바꾸고 김환기와 동거에 들어갔다. 몇 년 후에 그들은 정식으로 결혼했다.


김환기와 변동림(김향안)의 결혼사진. 1944년 5월.



김용준, <수향산방(樹鄕山房) 전경>, 1944, 종이에 수묵과 담채, 24×32㎝, 환기미술관.
화가이자 미술평론가, 미술사학자인 김용준(1904-1967)은 1944년에 성북동 자택
'노시산방(老柿山房: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 65-2)을 김환기에게 넘겨주고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 가능리 고든골(直洞)로 이주, 그곳의 집을 '반야초당(半野草堂)'
이라 이름짓고 살았다. 김환기는 노시산방을 자신의 호 수화(樹話)와 부인 김향안(金鄕岸)의
이름에서 한 자씩 따서 '수향산방'이라 지었다.
"근원선생의 취미를 살려서 손수 운치있게 꾸미신 한옥, 안방, 대청, 건넌방, 안방으로 붙은 부엌,
아랫방, 광으로 된 단순한 'ㄱ'자집. 다만 건넌방에 누마루를 달아서 사랑채의 구실을 했고
방마다 옛날 창문짝들을 구해서 구해 맞춘 정도로 집은 빈약했으나 이백 평 남짓 되는
양지바른 산마루에 집에 붙은 개울이 있고, 여러 그루의 감나무와 대추나무가 있는
후원과 앞마당엔 괴석을 배치해서 풍란을 꽃피게 하며, 여름엔 파초가 잎을 펴게 온실도
만들어졌고, 운치있게 쌓아올린 돌담장에는 앵두와 개나리를 피웠다. 앞마당 층계를 내려가면
우물가엔 목련이 피었다."_ 김향안


김상엽 관리자
업데이트 2017.05.24 0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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