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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운 동행: 이상과 구본웅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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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웅은 몸이 약해 소학교를 다니다말다 하는 바람에 이상과 같은 반이 되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꼽추인 구본웅을 따돌렸지만 그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이는 학생이 있었다. 항상 외롭고 우울해 보이는 김해경(이상)이었다. 당시 동급생 중에는 구본웅보다 몇 살이 더 많은 학생들도 있었다. 그래서 같은 학년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던 이상은 아이로 취급받았으며 적지 않은 급우들에게 존대어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이 많은 학생들이 그렇게 시켰기 때문이다. 졸업 후에도 이상은 구본웅에게 계속 존대어를 쓰며 4년 선배로 깍듯이 예우했다. 


이상의 <자화상>


구본웅. 1940년경 서양화가 철마(鐵馬) 김중현(金重鉉: 1901-1953)의 스케치 


구본웅은 신명학교 졸업 후 경성제1고등보통학교(경기중·고등학교의 전신)에 응시하여 필기시험에서는 상위권에 들었으나 면접과 사정회의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한동안 울분, 좌절, 허탈감에 마음 고생하던 구본웅은 미국인 선교사가 운영해서 다른 학교보다 분위기가 자유롭다고 소문난 사립 경신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교장이었던 쿤스(한국명 군병빈)의 자상한 배려와 관심 속에 구본웅은 매학년 1등을 했고 매주 토요일에는 고려화회(高麗畵會)에 나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춘곡 고희동에게서 서양화를 배웠다. 


<대경성부대관> - 경신고등학교 부근(종로구 연지동 136-17, 현 연동교회)


일제 강점기 초기에 서울에 세워진 불교 계열 교육기관인 동광학교를 거쳐 1927년 3월에 보성고보를 졸업한 김해경은 현재의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의 전신인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에 진학했다. 그의 졸업과 대학 입학을 축하하기 위해 구본웅은 김해경에게 사생상(寫生箱: 스케치박스)을 선물했다. 그것은 구본웅의 숙부인 구자옥(당시 ‘조선 중앙 YMCA' 총무)이 구본웅에게 준 선물이었다. 김해경은 간절한 소원이었던 사생상을 선물로 받은 감사의 표시로 자기 아호에 사생상의 ‘상자’를 의미하는 ‘상(箱)’자를 넣겠다며 흥분했다.


경성고등공업학교 미술부 화실에서의 이상


김해경은 아호와 필명을 함께 쓸 수 있게 호의 첫 자는 흔한 성씨를 따오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구본웅이 동의했더니 사생상이 나무로 만들어진 상자이니 나무 목(木)자가 들어간 성씨 중에서 찾자고 했다. 두 사람은 권(權)씨, 박(朴)씨, 송(宋)씨, 양(楊)씨, 유(柳)씨, 이(李)씨, 임(林)씨, 주(朱)씨 등을 검토하다, 다양성과 함축성을 지닌 것이 이씨와 상자를 합친 ‘이상(李箱)’이라며 탄성을 질렀다. 


1930년대의 ‘모던뽀이’들. 이상과 박태원, 김소운(시인, 수필가 1901-1981).
이상이 구본웅의 부친이 경영하던 인쇄소 겸 출판사인 창문사 교정부에 근무할 무렵인 1935년 무렵으로 추정.


소설가 박태원(朴泰遠: 1909-1987)이 김해경에게 아호의 유래를 묻자 건축과 졸업 후 부감독으로 나간 이화여자전문학교 공사장에서 인부들이 자신이 이씨인 줄 알고 이씨의 일본식 발음인 이상으로 잘못 부른 것에서 생겨났다고 둘러댔고, 이 내용은 다른 이 들에게 전해져 정설로 굳어졌다. 이상은 아호의 동기와 필명의 유래에 대해 비밀로 해달라고 요청했고 구본웅은 이상이 돌아간 후에도 침묵했다. 어떤 시인은 이상이 ‘정상이 아닌 상태’라는 이상(異常)과 부합되며 의식이 상자 속에 속박되어 있다는 근대적 상상력에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했다. 어떤 학자는 김씨 가문의 종손으로서 세속적 꿈이 아니라 김씨로부터 자유로운 자신 만의 혈통을 세워 오직 예술적 에너지만으로 충만된 새로운 자아의 자장을 만들려는 ‘이상(理想)’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했다. 또 어떤 작가는 상(箱)은 상자를 말함인데 갇힌 자의 절규를 뜻하지 않겠느냐고 되물었다. 하여튼 이상은 지하에서 낄낄거리며 좀 더 이상하고 좀 더 기발한 풀이와 주장이 횡행하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대경성부대관> 종로 1가 부분 - 제비다방과 그 주변


구본웅은 1929년 봄 동경의 일본대학 예술전문학부 미학과에서 예술이론을 공부한 후 귀국하였고, 1930년 봄 혼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태평양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유화를 전공하였다. 1930년 가을 일본 이과회전(二科會展)에 입선하였고 1931년 1월 제1회 독립미술가협회전람회 입선하여 이름을 날린 구본웅은 1931년 6월 동아일보의 제의에 의해 동아일보 사옥에서 개인전을 여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1933년 3월 초 구본웅은 태평양미술학교 본과를 졸업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구본웅의 스케치. 구본웅의 스케치를 모은 『虛屯記』
(허튼 글, 잡필기(雜筆記)의 의미, 1974, 한국근대미술연구회에서 간행)에서.



구본웅, 『虛屯記』에서.


한편 폐병이 심해진 이상은 2월 말에 총독부를 그만 둔 후 골방에 누워있었다. 구본웅은 요양을 위해 이상을 황해도 배천온천으로 데려갔다. 이상은 그곳에서 금홍(錦紅)을 만나게 되는데 그녀를 6월 초에 개업한 제비다방의 마담 겸 내연의 처로 맞아들였다.  


1933년의 이상. 배천에서 금홍이와 찍은 사진으로 추정된다.



구보 박태원이 직접 그린 제비 다방의 마담 금홍



김상엽 관리자
업데이트 2017.06.24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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