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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운 동행: 이상과 구본웅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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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소설, 수필에 걸쳐 다양한 작품 활동을 한 일제 식민지시기의 대표적인 작가인 이상(李箱: 1910-1937)과 표현주의 화가로 유명한 구본웅(具本雄: 1906-1953)의 우정은 잘 알려졌다. 이상과 구본웅은 모두 서촌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이상(1910-1937). 오른쪽 인물  


구본웅(1906-1953)



삽화가 이승만이 그린 이상과 구본웅
이상은 원래 천혜의 보헤미안이었다. 그의 머리는 봉두난발에 평생 붓질은 몰랐고 며칠씩 세수 거르기를 떡 먹듯 했다.
얼굴은 언제 보아도 창백한 것이 핏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데다가 수염은 창대같이 돋아나 마치 중병을 앓는 사람과 같았다.
그리고 일상의 생활을 아예 외면하는 터였다. 그런데 그에게 있어서 그의 입성가짐이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는 곧잘
‘보헤미안 넥타이’에 양복은 처음 입고서 헤질 때까지 다림질을 몰랐고 겨울철에 백구두 신기는 아마도
이상이 세계에서 최초의 ‘참피언’ 영광을 누리지 않았을까 싶다. … 그때 그와 명 ‘콤비’로 꼽추인 구본웅이
그와 곧잘 어울렸다. 그는 주로 중산모에 ‘인바네스(inverness: 남자용 외투. 소매가 없으며 연미복 또는 이브닝코트
위에 걸친다)’를 즐겨 입었다. 발은 칠피구두와 구두 목을 덮는 ‘캐돌(영국신사들이 상용하는 구두 목에 끼어 신게 된 먼지가리
겸한 악세사리의 일종)’로 단단히 치장했다. 그의 이런 차림도 알고 보면 까닭이 있게 마련이다. 그는 선천적으로 꼽추 태생이었다.
그 자신은 한 번도 입 밖에 낸 일은 없으나 사람들로부터 느끼는 열등감에 대한 무언의 반기를 드는 행위에서 나온
것이리라.(이승만, 『풍류세시기』, 중앙선서 1(중앙일보사, 1977), 214-215쪽. 이상과 구본웅이 함께 다니면 아이들은
곡마단이 온 걸로 착각했다고 전한다. 이상은 통의동에 구본웅은 바로 옆 동인 필운동에 살았다.
/ 삽화가 이승만(李承萬: 1903-1975)은 종로구 옥인동 이완용의 옆 집 살았고 그 옆집에는 한때 청전 이상범이
살았다고 했다. 조용만, 『울 밑에선 봉선화야 - 30년대 문화가 산책』(범양사출판부, 1985), 229쪽)


이상은 아버지가 이발소를 경영하던 사직동에서 태어나 세 살 때 이웃 통인동 154에 살던 큰아버지에게 입양됐다. 그는 유아기의 2년과 28살 요절하기 전 말년의 4년 정도를 제외하면 그의 일생의 대부분을 서촌에서 살았다. 구본웅은 그 두 동네 사이에 위치한 필운동 89, 90번지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이상과 구본웅은 필생의 친구로서 ‘아름다운 동행’, ‘아름다운 동반자’가 되었다.1)



<대경성부대관> 서촌 부분(이상의 집- 통인동 154, 구본웅의 집- 필운동 89, 90번지)



<대경성부대관> 서촌 부분(위 지도의 확대). 이상과 구본웅의 집은 직선거리로 200미터가 되지 않는다.


이상과 구본웅은 모두 인왕산 아래 누상동 신명학교를 1921년에 졸업했다. 구본웅이 이상보다 네 살이 많았으나 함께 학교를 다니게 된 것은 구본웅의 불행 때문이다. 1906년 3월 7일 서울 종로구 필운동에서 태어난 구본웅은 산후병에 걸린 그의 어머니 상산(商山) 김(金)씨가 산후조리를 위하여 친가가 있는 황해도 연백으로 가는 길에 데리고 갔지만 그의 어머니는 4개월 만에 운명하였다. 그래서 구본웅은 동네사람들에게 젖동냥을 다녀야 했다. 젖을 얻어 먹이고 집에 돌아와 대청마루에 오르던 하녀 복실이가 등에 업힌 두 살 무렵의 구본웅을 댓돌 위에 떨어뜨렸다. 돌 위에 떨어진 그는 엄청난 충격과 아픔에 오랫동안 울음소리도 내지 못했다. 1년이 지나 아버지 구자혁은 아이의 척추가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치료를 위해 즉시 서울 본가로 돌아왔지만 구본웅은 곱사등이가 되었다는 진단을 받았다.



구본웅 출생지의 현재 모습. 
위 사진은 사직공원에서 효자동 방향으로 바라 본 모습으로서 중앙의 오른쪽에 ‘THE SOHO'라고 써진 건물과 그 뒤의 필지가 필운동 89, 90번지이다.
아래 사진은 효자동 방향에서 사직공원 방향으로 바라 본 모습이다. 화면 중앙 오른쪽의 건물이 ‘THE SOHO'이다. 




이상의 집. 통인동 154(2009년에 문화유산국민신탁이 첫 보전재산으로 매입하였으며, 재단법인 아름지기가 관리·운영하고 있다)


구본웅이 네 살 때 변동숙(1890년 생)이라는 분이 계모로 들어왔다. 만 19세의 그녀는 잠사(蠶絲)학교를 졸업한 고학력 엘리트였지만 결혼 적령기에 들었을 때 집안 살림이 기울었다. 그래서 어린 아들 하나 있는 양반 출신 부자에게 시집간다는 것에 동의했지만, 양육해야할 아들이 곱사등이라는 것을 알고서 몹시 당황했다고 한다. 변동숙의 남편과 구본웅에 대한 정성은 지극했다.


변동림(1916-2004. 후에 김향안으로 개명)


변동숙의 아버지 변국선은 늦게 둔 소실에게서 1남 2녀를 낳았는데 그중 장녀가 훗날 이상과 결혼한 변동림(卞東琳: 1916-2004)이다. 변동숙은 변동림 보다 무려 26세나 더 많은 이복언니로서 두 사람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게다가 구본웅의 아버지가 장인 변국선 댁의 살림을 돕고 있었기 때문에 친정과 이복동생들에 대한 변동숙의 영향력이 적지 않았다. 변동숙은 변동림이 폐병이 심한 6살 연상의 이상과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극구 만류했다. 그녀는 이상이 동경으로 갈 때 구본웅이 이상을 경제적으로 돕는 것은 묵인했지만, 이복동생 변동림의 동경 유학을 지원하는 것만은 용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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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글은 구본웅의 종질인 구광모, 「우인상(友人像)과 여인상(女人像): 구본웅, 이상, 나혜석의 우정과 예술」, 『신동아』 2002. 11월호, 630-665쪽을 정리했다.
김상엽 관리자
업데이트 2017.05.24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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