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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벽수산장과 송석원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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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휘각과 가재우물
지금의 옥인동 제1주택재개발지역으로 지정된 옥인동 47번지 일대를 포함해 옛 우물길의 양쪽 계곡이 옥류동(玉流洞)이었다. 거기서 남쪽 언덕 너머로 인왕산 수성동에서 내려오는 물길을 끼고 있는 양쪽 지역은 인왕동(仁王洞)이었다. 이 두 동네에서 한 글자씩 따서 지금의 옥인동(玉仁洞)이라는 동네 이름이 태어났다.


현재의 지적도에서 본 옥류동과 인왕동. 물길을 기준으로 옥류동(노란색)과 인왕동(연두색)이 있었다. 지금의 옥인동은 옥류동과 인왕동이 일제시기에 합쳐진 이름이다.

 
옥인동 47-376번지 가옥의 모퉁이는 주민들 사이에 이른바 ‘가재우물’로 전해지는 곳이다. 쇠창살 사이로 옛날 샘물터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가재우물은 청휘각(淸暉閣)의 두 번째 주인 김창업의 호 ‘노가재(老稼齋)’에서 온 것이다. 청휘각은 조선 현종 때의 문신 김수항(金壽恒)이 송석원 자리에 숙종 12년(1686) 그의 나이 57세 때에 지은 정자이다. 


정선(1676-1759), <청휘각(晴暉閣)>, 종이에 담채, 33.2×29.5㎝,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 중,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 당시에는 송석원이라 불리지 않고 옥류동이라 불렸다. 김수항에 의해 개창된 옥류동은 후손들에게 가전(家傳)되다가 김수항의 6세손인 김수근에 의해 중건되었다. 김수근의 아들 김병국이 이것을 물려받은 뒤에 다시 김병국의 재종형 김병교에게 돌아갔고, 김병교의 아들 김학진에 와서 명성황후를 등에 업고 호가호위하던 민태호(閔台鎬), 민규호(閔奎鎬)의 세도에 밀려 1870년대에 민씨 일가에 억지로 넘겨주었다. 


1950년대의 가재우물 사진


약 200년 10대에 걸친 옥류동 장동김씨 시절이 끝난 셈이다. 그 명분은 어처구니없게도 ‘민규호가 병들어 가재우물의 샘물을 마시기 원했다’는 것이었다. 이 뒤로 옥류동은 또다시 민씨 일가의 전유물이 되었고 민규호의 맏형 민태호의 아들 민영익이 정원에다 스스로 ‘송석원’이라는 이름을 써서 벽 위에 걸어 놓았다고 한다. 1882년 민태호의 딸이 세자빈으로 간택되어송석원이 왕실 처족 세도정치의 중심지로 급부상했으나 민태호 본인이 딸의 영광을 본 직후인 1884년에 죽었고, 1904년 순명비 민씨도 남편의 왕위 등극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민태호의 아들인 민영린이 지방으로 떠나자 송석원도 남의 손에 넘어갔다가 윤택영의 따리 1906년 황태자비로 간택되고, 그 힘을 얻은 큰아버지 윤덕영이 시종원경이 되어 나라 팔아먹는 일에 앞장 선 공으로 각종 이권을 얻는 가운데 송석원의 세 번째 주인으로 등장하였다. 이 우물은 1960년대 이후 식수로는 사용되지 않고 있다. 


현재 가재우물 위의 바위에 들어선 주택 건물. 쇠창살에 가로막힌 가재우물 자리






재개발 직전의 주택과 고급주택이 공존하고 있는 윤덕영 집터. 현재의 옥인동 필운대로 9길.


박노수미술관
종로구립박노수미술관은 윤덕영의 딸과 사위가 거주한 2층 양옥으로서 화신백화점, 간송미술관 등을 설계한 당대 최고의 한국인 건축가 박길룡(1898-1943)이 1937년 무렵 지었으며 서울시 문화재자료 1호이다. 뒤뜰에 추사 김정희의 각자(刻字) ‘송석원’과 ‘벽수산장’이라는 글씨가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종로구립박노수미술관이 된 윤덕영의 딸과 사위가 살던 집



종로구립박노수미술관 뒤뜰 전망대 근처에서 바라본 정경. 멀리 배화여대가 보인다.



추사 김정희의 각자(刻字) ‘송석원’과 ‘벽수산장’이라는 글씨가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종로구립박노수미술관 뒤뜰.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17.05.22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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