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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벽수산장과 송석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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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엽(건국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1951년의 경복궁 주변사진. 왼쪽 붉은 점선 안에 벽수산장이 보인다.


옥류천 일대를 송석원이라 부르게 된 것은 천수경의 집이 “옥류천이 시작되는 곳 조금 위의 바위로 둘러처진 곳(玉流泉上 松石之下)”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의 이름도 송석원이라 붙였고, 그 이후 옥계시사의 이름도 이 시사(詩社)의 맹주(盟主: 동맹을 맺은 개인이나 단체의 우두머리)의 당호를 따라 ‘송석원시사’가 되었다. 
  1786년 7월 16일에 결성된 송석원시사는 5년이 지난 1791년 유둣날(음력 유월 보름날) 시회를 열었다. 모임이 당초 낮에 열렸지만 오후에 비가 내린 때문인지 장소를 바꿔 한 번 더 모였다. 이런 정황이 당대 최고의 화가로 꼽히는 이인문과 김홍도의 그림에 그대로 옮겨졌다. 낮의 모임은 이인문의 <송석원 시회도(詩會圖)>, 밤의 모임은 김홍도의 <송석원 야연도(夜宴圖)>라는 제목으로 그렸는데 낮의 모임이 시회인데 반하여 밤의 모임은 술자리 성격이 강했던 것 같다.


이인문, <송석원시회도>, 1791년경, 종이에 담채, 25.6×31.8㎝


김홍도, <송석원시사야연도>, 1791년경, 종이에 수묵, 25.6×31.8㎝
    화면 오른쪽 상단에 둘러 앉아 있는 사람들 가운데 망건 쓴 인물이 천수경으로 추정된다.


이인문의 그림과 김홍도의 그림은 완연히 다르다. 이인문의 그림에서는 ‘송석원’이라 써진 절벽 아래에 옹기종기 사람 들이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이고 김홍도의 그림에서는 언덕 위의 펑퍼짐한 공간에서 사람들이 둘러 앉아 있는 모습으로 되어 있다. 이 두 그림과 이날 모임에서 지어진 시들이 규장각 서리를 지낸 김의현(金義鉉)의 『옥계청유첩(玉溪淸遊帖)』에 모아져 편집된 것으로 미루어, 대략 김의현이 1791년 유둣날 작성된 작품들을 모아 두었다가 1791-97년 사이에 두 화가를 찾아가 그림을 그려줄 것을 부탁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두 그림에 써진 글씨는 중인 서예가로 유명한 마성린(馬聖麟)의 것으로 1797년 김의현의 집에 들렀다가 두 사람의 그림에 각각 발문을 쓴 것이다. 공교롭게도 1745년생 동갑내기인 이인문과 김홍도 두 사람이 낮과 밤의 전황을 상상하고 상의해 가며 그렸을 것으로 생각하면 더욱 흥미로워 진다. 


추사 김정희가 1817년에 새긴 ‘송석원’ 각자. 김영상 사진, 1950년대 후반


이인문의 그림왼쪽 바위 옆에 ‘松石園’이라는 글씨가 세로로 또렷이 써져 있지만  1950년대부터 서울의 역사를 연구하고 촬영한 김영상의 사진에서는 가로 새김 글자로 되어 있다. 김영상의 사진에 보이는 ‘송석원’ 글자 뒤의 “丁丑淸和月小蓬萊書”라는 작은 글자는 많은 정보를 알려 준다. 정축은 1817년(순조 17) 그의 나이 32세 때이다. 이 글자는 아마도 천수경이 육십 세가 되는 해에 누군가가 김정희에게 휘호를 부탁했던 것 같다. 조선 후기 중인들의 시사에서는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에게 평을 부탁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이 경우도 비슷한 경우로 여겨진다. 이인문의 그림에는 ‘송석원’ 글씨가 세로로 되어 있지만 사진은 가로로 되어 있어 글씨의 정확한 모습과 위치가 궁금해진다. 분명한 것은 이인문 그림은 시회가 열렸던 1791년에서 마성린이 발문을 붙인 1797년 사이에 그려진 것이고, 김정희의 글씨는 1817년에 써졌다. 따라서 이인문 그림의 글씨와 김정희와는 관계가 없다. 이인문은 여기가 송석원이라고 말하고 싶었는지 아니면 당시에 이미 그렇게 써진 글자가 있었는지 아직 확실치 않다. 
  김영상은 『서울 육백년』에서 “‘송석원’ 새김 글자는 송석원 울 안 중간 지점 쯤에 있는 꽤 큼직한 벼랑위에 새겨져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이 글자를 봤다는 이도 거의 없었고 애매한 표현이라 확실히 고증하기 힘들었다. 


최근에 발견된 ‘송석원’바위 각자 사진. 사진 위쪽의 ‘벽수산장’이라는 각자 왼쪽에 횡서로 ‘송석원’ 각자가 보인다.
사진의 주인공은 윤덕영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 ‘송석원’ 바위 글씨가 등장하는 사진이 한 장 발굴되었다. 사진의 주인공은 윤덕영이고 촬영시기도 1910년대 혹은 1930년대로 추정된다. 다만 “송석원이라는 글씨가 써진 바위는 시멘트로 발랐다” 그리고 “옥류동이라 쓴 바위는 집을 지을 때 집장사 들이 깨서 없앴다”는 주민의 전언은 이 방면에 관심 있는 이 들을 안타깝게 한다. ‘송석원’, ‘벽수산장’의 각자는 현재의 종로구 옥인동 168-2 현 종로구립박노수미술관 뒤편의 계단식 바위벽에 파묻혀 있을 가능성이 크다. 종로구립박노수미술관 건물은 윤덕영이 1938년 그의 딸 부부를 위해 지어준 집으로서 서울대학 교수를 지낸 한국화가 박노수(1927-2013)가 1972년부터 소유하였다가 종로구에 기증하여 2013년 개관했는데, 바위 옆의 계단을 통해 본체와 연결되었다.


윤평섭의 논문 「송석원에 대한 연구」(『한국정원학회지』 제3권 제1호(1984.7))에 소개된 <1940년경의 송석원 배치도> 
  벽수산장 뒤의 한옥은 윤덕영의 소실이 거주하던 집으로 현 옥인동 47-133 서용택 가옥이다.
앞 쪽의 2층 양옥이 윤덕영의 딸과 사위가 살던 집으로 지금의 종로구립박노수미술관이다.













김상엽 관리자
업데이트 2017.08.17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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