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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년대의 경성지도 <대경성부대관>
  • 1688      

김상엽(건국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여기 한 장의 지도가 있다. 세로 142㎝, 가로 153㎝의 족자형태로 남산 위에서 북서쪽으로, 북악산과 인왕산을 내려다보는듯한 구도로 그려져 있는 지도로서 <대경성부대관(大京城府大觀)>이라 되어 있다. <대경성부대관>의 제작 시기, 구도, 내용 등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일본이 조선 시정 25주년 기념으로 1936년 7월 28일 인쇄 및 납본된 후 1936년 8월 1일 발행된 파노라마 지도로서 경성부를 비롯하여 인천부, 영등포, 명수대(현 동작구 흑석동)를 대상으로 그렸다. 지도를 그리고 편집한 사람은 오노 가즈미사(小野三正: 교토시 거주), 저작자는 이시카와 류조(石川隆三), 발행인은 조선신문사(朝鮮新聞社)의 편집국장이었던 와다 시게요시(和田重義), 출판은 안내서․역사서․인명록 등을 주로 발간․인쇄하였던 조선신문사, 인쇄는 정판인쇄주식회사(精版印刷株式會社)에서 했으며, 가격은 20엔(圓, 현재 7-8만엔 정도의 가격)이었다. 파노라마 지도란 조감도와 같이 한 지점에서 주위의 넓은 경관을 입체적으로 그린 지도를 말하는 것으로, 이 지도를 이루고 있는 경성부는 1935년 서울의 하늘에서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공중에서 도시와 건축을 바라보고 그렸기 때문에 기존의 지도와 같이 도시의 조직뿐만 아니라 건물의 입면까지 파악할 수 있다.


<대경성부대관>, 1936, 142×153㎝, 조선신문사,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대경성부대관>은 칼라 파노라마 지도로서, 모든 사물의 외곽선은 옅은 흑색으로 그려져 있고 그 안을 채색하는 방식으로 그려져 있다. 산은 전체적으로 녹색이지만 굴곡에 따라 음영이 가미되었고, 북악산이나 인왕산의 암반은 옅게 칠해져있다. 청계천과 한강 및 그 지류의 물은 푸른색으로 되어 있다. 건물 또한 외곽선 안이 채색되어 있는데, 한 채 한 채가 세심하게 그려져 있어 건물의 전체적인 외형을 식별할 수 있다. 조감도로 그려져 있기 때문에 지붕형태를 구별할 수 있으며 건물의 창문이나 문을 통해 건물의 층수도 추정할 수 있다. 
  현재까지 발견된 지도는 공중에서 수직으로 지면을 바라보고 정사영된 상태를 지도상에 표기하기 때문에 건물의 평면적 현태와 도시 조직의 경계는 식별하는 데에 적합했으나 건물의 높이 정보까지 담고 있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대경성부대관>은 1930년대의 서울, 인천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재료가 된다. <대경성부대관>은 특정한 행사나 안내를 목적으로 제작한 지도가 아니기 때문에 의도된 변형은 찾기 어렵다. 기밀지역은 풀숲으로 처리하거나, 사진과 색인표 등을 이용하여 가리고 있다.*1


<대경성부대관> 부분(현 종로구 옥인동, 효자동, 통인동, 창성동 등)


  이 연재는 <대경성부대관>을 중심으로 1930년대의 미술지도를 복원하고자 한다. 1930년대는 이 시기는 ‘만주 특수’와 ‘황금광시대’로 요약되는 투기의 시대였다. 1930년 1월부터 일본이 금본위제로 복귀하면서 총독부가 추진한 산금정책(産金政策)에 따라 한반도에 금광개발 열기가 불어 닥쳤고 금값이 폭등했으며 1931년부터 시작된 일본의 만주침략으로 1930년대 중반에 본격적인 만주 특수가 일어나 주식이 최고의 호황을 맞게 되었다. 당시 식민지 민중들의 민생은 도탄에 빠져 있었지만 일부 자본가들은 호황의 극을 달렸다. 이와 같은 사회상 속에서 골동수집 열기는 고조되었고 당시 조선 유일의 미술품 유통회사였던 경성미술구락부(京城美術俱樂部)는 활성화 되었다.*2  


이완용의 옥인동 집 모습을 일부나마 보여주는 유일한 사진
만년의 이완용이 “순양식 2층짜리 건물”인 바깥채 앞에서 차남 이항구(뒷줄 가운데) 및 네 손자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1910년대 후반으로 추정된다.



삽화가 이승만이 그린 이상과 구본웅
이상은 원래 천혜의 보헤미안이었다. 그의 머리는 봉두난발에 평생 붓질은 몰랐고 며칠씩 세수 거르기를
떡먹듯 했다. 얼굴은 언제 보아도 창백한 것이 핏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데다가 수염은 창대같이
돋아나 마치 중병을 앓는 사람과 같았다. 그리고 일상의 생활을 아예 외면하는 터였다. 그런데
그에게 있어서 그의 입성가짐이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는 곧잘 ‘보헤미안 넥타이’에 양복은 처음 입고서 
해질 때까지 다림질을 몰랐고 겨울철에 백구두 신기는 아마도 이상이 세계에서 최초의 ‘참피언’ 
영광을 누리지 않았을까 싶다. … 그때 그와 명 ‘콤비’로 꼽추인 구본웅이 그와 곧잘 어울렸다. 
그는 주로 중산모에 ‘인바네스(inverness: 남자용 외투. 소매가 없으며 연미복 또는 이브닝코트 위에 걸친다)’를
즐겨 입었다. 발은 칠피구두와 구두목을 덮는 ‘캐돌(영국신사들이 상용하는 구두 목에 끼어신 게 된 먼지가리
겸한 악세사리의 일종)’로 단단히 치장했다. 그의 이런 차림도 알고 보면 까닭이 있게 마련이다.
그는 선천적으로 꼽추  태생이었다. 그 자신은 한 번도 입 밖에 낸 일은 없으나 사람들로부터 느끼는
열등감에 대한 무언의 반기를 드는 행위에서 나온 것이리라.
*3


  <대경성부대관>을 중심으로 1930년대의 미술지도를 복원 작업은 당시 활동했던 미술가들의 거주지를 파악하는 것을 시작으로 한다. 휴대폰이나 인터넷은 물론 전화도 거의 없던 시절이었기에 이들의 연락이나 접촉은 직접적인 만남이나 구전 등을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활동을 파악하는 데 있어 거주지 파악이야말로 중요성을 갖는다. 거주지 정보를 통해 이들의 교유 및 영향관계 등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나아가 이들의 활동 공간인 전시 공간은 물론 서점, 카페, 다방, 술집, 음식점 등에 대한 정보, 이들과 교류한 인사들의 정보를 자료화하여 이용한다면 근대에 대한 우리의 인식의 스펙트럼은 훨씬 넓고 다양해질 것으로 생각한다. 이 작업은 단순한 미술지도 제작의 차원을 넘어 미술을 통한 문화지도를 복원이자 근대 서울의 근대적 모습을 미술의 눈을 통해 복원하려는 시도이다.  


이여성·이쾌대 형제의 가족 사진
맨 앞줄 왼쪽부터 이쾌대의 부인 유갑봉, 이쾌대, 이여성의 차녀 이미생, 이여성의 장남 이한구,
어머니 윤정열 여사, 다음 줄 왼쪽부터 이여성의 장녀 이호생, 아버지 이경옥, 맨 뒷줄 이여성의
부인 박인애, 이여성.



※ 이 연재는 <대경성부대관>을 처음으로 소개하신 최종현 통의도시연구소장님의 허락에 의해 가능했다. 한양대학교 도시공학과에서 정년하신 후에도 정력적인 활동을 하고 계신 최종현 선생님의 후의에 깊이 감사드린다. 아울러 한양대학교 건축학부 한동수 교수님의 도움에도 감사드린다.

※ 이 연재에서는 <대경성부대관>을 여러 방식으로 이용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서촌의 경우 화가들만의 거주지를 표기한 지도를 제시할 경우도 있고 문인들만의 거주지를 표기한 지도를 다시 제시할 수 도 있으며 건축물만을 강조한 지도를 제시할 수도 있다. 곧 하나의 장면에 여러 다른 내용을 실어 연재하기도 하고 이를 종합하여 하나의 화면으로 제시할 수도 있다. 

※ 근대의 일이라 기억의 오류가 있을 수도 있고 자료의 해석에 차이가 있을 수 있으며 자료가 미비하여 다루지 못한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수정 및 보완이 필요한 부분을 알려주시면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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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수연, 「<대경성부대관> 읽기」, 『대경성부대관』(서울역사박물관, 2015), 9-13쪽; 최종현 외, 「<대경성부대관> 경성부 해설」, 『대경성부대관』, 124-127쪽
*2 전봉관, 『황금광시대』(살림, 2005); 한수영, 「하바꾼에서 황금광까지 - 채만식의 소설에 나타난 식민지 사회의 투기 열풍」, 박지향 외 엮음,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1(책세상, 2006), 64-106쪽; 김상엽, 『미술품 컬렉터들』(돌베개, 2015) 참조
*3 
이승만, 『풍류세시기』, 중앙선서 1(중앙일보사, 1977), 214-215쪽. 이상과 구본웅이 함께 다니면 아이들은 곡마단이 온 걸로 착각했다고 전한다. 이상은 통의동에 구본웅은 바로 옆 동인 필운동에 살았다. / 삽화가 이승만(李承萬: 1903-1975)은 이완용의 옆 집 살았고 그 옆집에는 한때 청전 이상범이 살았다. 조용만, 『울 밑에선 봉선화야 - 30년대 문화가 산책』(범양사출판부, 1985), 229쪽
김상엽(건국대학교) 관리자
업데이트 2017.10.24 0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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