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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예미술품, 역사가 된 개인의 삶 - <여름의 조각들>과 아르누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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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누보, 삶을 위한 예술

영화 <여름의 조각들>(L'Heure D'ete, Summer Hours, 2008)
글/ 정준모

 어머니가 사용하던 세간들은 거개가 ‘새로운 예술’이란 의미의 아르누보풍의 공예품들이다. 아르누보 운동은 역사적인 전통을 버리고 새로운 아름다움을 창조하고자 했다. 이들은 예술이란 높고 이상적인 것이 아니라 생활 속의 예술이며 삶의 일부라야 한다고 믿었다. 

 아르누보는 미술의 범주를 회화뿐만 아니라 건축, 그래픽 아트, 인테리어 디자인, 보석, 가구, 섬유, 조명과 가정용 도구 즉 살림살이 등 장식예술을 포함하는 모든 예술로 그 영역을 확대했다. 이들에게 예술은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산업혁명 이후 부유해진 중산층들은 아르누보풍의 가구, 식기류, 직물, 장신구, 도자기를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중산층의 삶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실용적인 일상에서 사용하는 물건의 경우라 할지라도 미적인 것이라야 했다. 이런 아르누보 풍은 1910년경 모더니즘이 건축과 장식미술 스타일을 대체할 때까지 영향력을 행사했고 현재의 중요한 공예품으로 소위 명품으로 불리는 여러가지 브랜드들도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아르누보 운동의 시작은 영국의 월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1834~1896)였다. 그는 일상의 미술품인 공예품이 기계에 의해 대량 생산되면서 손의 가치를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가졌고 당시 풍미하던, 시대에 뒤떨어진 과장된 복고 양식들을 거부했다. 이러한 뜻을 이어 모리스의 제자들은 미술공예운동(Art & Crafts Movement)을 전개했다. 또 스코틀랜드 출신인 찰스 레니 매킨토시(Charles Rennie Mackintosh, 1868~1928)는 후에 그의 아내가 되는 마가렛 맥도널드(Margaret MacDonald, 1864~1933)와 처제가 될 프랜시스 맥도날드(Frances MacDonald, 1873~1921), 제임스 허버트 맥네어(James Herbert McNair, 1868~1955)와 함께 ‘4인 그룹’(The Four)을 결성해 아르누보 운동을 전개했다.  


찰스 레니 맥킨토시 Wall Panel for the Dug-Out(Willow Tea Rooms, Glasgow) 글래스고 미술대학(1897-1909 건축)


  초기 아르누보 풍의 전형으로는 모리스의 <붉은 집(Red House, 1859)>이 있다. 또 영국에서 활동하며 “예술을 위한 예술”을 표방했던 미국화가 휘슬러(James Abbott McNeill Whistler, 1834~1903)의 호화로운 <공작 방(Peacock Room)>도 대표적인 영국의 아르누보 양식이다.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 화가인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Dante Gabriel Rossetti, 1828~1882)와 에드워드 번 존스(Edward Burne- Jones, 1833~1898), 오브리 비어즐리(Aubrey Vincent Beardsley,1872~1898)의 영향을 받은 판화가 셀윈 이미지(Selwyn Image, 1849~1930), 삽화가 헤이 우드 섬너(Heywood Sumner, 1853~1940), 월터 크레인(Walter Crane, 1845~1915), 조각가면서 금속공예가였던 알프레드 길버트(Alfred Gilbert,1854~1934)등이 아르누보를 대표하는 작가이며 ‘장식미술’을 처음으로 강의한 윌리엄 모리스를 비롯한 수공예운동가 그룹에 의해 자리를 잡았다.
   


모리스의 Red House, 1859, 런던, 영국

 이런 아르누보운동은 벨기에로 전파되면서 전 유럽으로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벨기에는 1830년 혁명 이후 세워진 작은 나라였지만 풍부한 자연자원을 바탕으로 급속하게 산업이 발달하면서 19세기 중반부터 말까지 영국 다음으로 중요한 산업국가로 등장했다. 영국의 수공예운동을 벨기에는 대륙으로 연결시켰다. 그 중심에는 벨기에의 건축가들이 있었는데 앙리 반 데 벨데(Henry van de Velde, 1863~1957)와 기능주의를 주창한 빅토르 오르타(Victor Horta, 1861~1947) 그리고 폴 앙카르(Paul Hankar,1859~1901)등이 그들이다. 지금도 브뤼셀의 익셀(Ixelles) 지구 루이스 가(Avenue Louise, Louizalaan)에 가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아르누보의 거장 빅토르 오르타(Victor Horta)의 저택과 아틀리에, 그리고 타셀 저택(Hôtel Tassel), 솔베이 저택(Hôtel Solvay), 반 에드벨데 저택(Hôtel van Eetvelde)등을 만날 수 있다. 


빅토르 오르타가 디자인한 Hotel Tassel, 1893, 브뤼셀, 벨기에


 사실 아르누보라는 말이 일반화된 것은 독일의 미술품과 공예품등을 판매하던 사무엘 빙(Samuel Siegfried Bing, 1838~1905)이 1895년 파리에 문을 연 메종 드 아르누보(Maison de l’Art Nou veau, House of New Art)에서 비롯되었다. 빙의 갤러리는 벨기에의 반 데 벨데가 장식을 맡았는데 1900년 만국 박람회에 현대적인 가구, 태피스트리, 공예품등을 출품해서 엄청난 호응과 명성을 얻었다. 아르누보라는 말은 박람회 이후 빙 갤러리에서 제공했던 새로운 스타일을 규정하는 일반적인 단어로 자리 잡았다. 프랑스는 아르누보를 발전시켜 ‘900년 양식’이라고 칭하면서 최전성기를 이루었고, 프랑스 아르누보를 이끈 건축가 헥토르 기마르(Hector Guimard, 1867~1942)의 이름을 따 ‘기마르 양식’이라고도 불렀다. 기마르는 식물문양의 지하철 역 입구장식을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또 체코 출신으로 파리에서 회화와 포스터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활동을 펼쳐 후대에 일본과 한국 순정만화의 전형을 제공한 알폰스 무샤(Alfonse Maria Mucha, 1860~1939)와 보석장식가 르네 줄 랄리크(Rene Jules Lalique, 1860~1945)가 있다. 또 유리, 금속 그리고 도자에 능했던 공예가 에밀 갈레(Émile Gallé, 1846~1904 )와 유리공예가 다움(Jean Daum, 1825~1885), 영화 속 책상의 명인 루이스 마조렐(Louis Majorelle, 1859~1926), 목공예가 유진 발랭(Eugène Vallin,(1856~1922)와 자크 그루베(Jacques Gruber, 1870~1936)등 유명 공예가들이 보불전쟁 후 회복된 낭시(Nancy)로 들어와 낭시학파(Ecole de Nancy)를 결성해 아르누보의 상징 도시로 만들었다. 


기마르가 디자인한 파리 지하철 아베스Abbesses 역 출입구. photo by stevecadman 



알폰스 무샤Alfonse Maria Mucha <하루의 시간-휴식의 밤, 저녁의 몽롱함, 대낮의 광채, 아침의 깨어남> 1899


 이런 낭시학파의 중심에는 마조렐이 있다. 그는 파리의 에꼴 드 보자르에 입학했고 2년간 바르비종파의 장 프랑수와 밀레(Jean François Millet, 1814~1875)를 2년간 사사했다. 그러다 낭시에 있는 아버지의 가구 공방을 물려받아 처음에는 로코코 양식의 전통가구를 제작했다. 이후 갈레의 영향으로 자연주의적인 아르누보 양식의 디자인을 시작했는데 오히려 갈레의 디자인을 능가하여 더 우아하며 추상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당시 낭시는 아르 누보의 양대 산맥으로 파리학파와 함께 낭시학파를 이루어 일약 예술의 도시로 부상했다. 공예가 갈레와 돔, 마조렐 등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아르누보가 파리에서 발흥했지만 낭시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아르누보는 없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조렐은 수공예의 특성을 지키면서도 손과 기계의 분업을 통해 목제품, 상감세공품, 청동제품, 가구, 조각 등을 수공업의 범주를 넘어서는 분업화된 현대적인 작업장에서 만들어 생산량을 증대시켜 가격을 내리는 경영기법을 통해 공예미술의 대중화를 실현했으며 이를 통해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었다. 따라서 최근 마조렐의 존재는 갈레나 헥타 기마르의 명성을 넘어서서 그 가치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루이스 마조렐이 디자인한 마호가니 책상. 1902-3, 오르세 미술관 소장


 벨기에에서 독일로 건너온 아르누보는 다른 곳보다 조금 늦게 출발했다. 1902년 에센지방에 개관한 헨리 반 데 벨데가 설계한 폴크방크 미술관(Museum Folkwang)(1902)은 독일의 건축과 공예계에 큰 자극이 되었다. 이후 뮌헨에서 발행하는 『유겐트』(Jugend)라는 잡지가 아르누보 스타일을 전파하면서 여기서 유래되어 유겐트슈틸(Jugendstil)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독일공작연맹의 선구가 된 피터 베렌스(Peter Behrens, 1868~1940)와 1861년부터 잡지 『유겐트』와 『판』(Pan)을 디자인한 베른하르트 판콕(Bernhard Pankok, 1872~1943), 1910년 부뤼셀 박람회에서 18C 후기 양식의 가구를 디자인하여 선풍을 일으켰으며, 상감기법과 유닛 가구를 선보였던 파울 브루노(Paul Bruno, 1874~1968), 독일의 타이포그래퍼 겸 디자이너로서 오늘날 아르누보 양식의 이론가로 알려진 오토 에크만(Otto Eckmann, 1865~1902) 등이 대표적인 작가들이다. 

 또 아르누보는 오스트리아 빈의 분리파 예술가들과 만난 후 헝가리, 체코 전역으로 번져나갔는데 이들을 제세션(Secession)이라 불렀다. 빈의 아르누보는 화가인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가 주동이 되어 건축가이자 아르데코와 모던 양식 가구의 길을 열어간 요제프 호프만(Josef Hoffmann, 1870~1956), 격자무늬의 기하학적인 비너 베르크슈테테(빈 공방 Wiener Werkstätte) 스타일을 만든 콜로만 모저(Koloman Moser, 1868~1918), 요제프 올브리히(Joseph Olbrich, 1867~1908)등 19명의 젊은 작가들을 모아 ‘오스트리아 미술가연합(Vereinigung bildender Kunstler osterreichs)’을 결성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콜로몬 모제의 전형적인 빈 공방(Wiener Werkstätte)스타일의 의자, 1902


 이탈리아에서는 건축가 주세페 소마루가(Giuseppe Sommaruga, 1867~1917)등이 활동한 '스틸레 리버티(Stile Liberty)'라는 이름으로,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한 스페인에서는 성 파밀리아 성당(La Sagrada Familia)로 유명한 건축가 가우디(Antoni Gaudí, 1852~1926)가 중심을 이루는 ‘아르테 호벤’(Arte Joven)운동으로, 미국에서는 ‘모던 스타일’이란 이름으로 불렸는데 특히 미국에서는 건축가 루이스 설리반(Louis Sullivan, 1856~1924)과 루이스 컴포트 티파니(Louis Comfort Tiffany, 1848~1933)가 중심을 이루었다. 특히 티파니의 공예품들이 일상으로 파고들면서 그 작품과 관련지어 ‘티파니 스타일’로 불리기도 했다. 각기 이름은 다르지만 같은 범주의 예술운동이었다. 아르누보는 짧게는 1890년경부터 1910년경까지 또는 20세기 전반까지 유럽은 물론 미국까지 유행한 ‘범세계적인’ 양식이다. 아르누보는 그림보다 인간의 삶과 직접관련이 있는 공예와 건축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그림은 물론 가구, 유리공예, 보석, 스테인드글라스, 장식용 포스터 등등의 장식미술을 통해 예술을 일상으로 끌어들였다. 오늘날 명품이라고 불리는 많은 공예품들이 이 시대에 출발하면서 공예가 미술품의 영역에 자리하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그 명성을 이어오고 있는 것은 그들의 장인정신, 예술가로서의 자부심이 바탕이 되는 때문이며 이런 공예품들의 미적, 실용적 가치를 알고 구입해서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영화에는 이러한 아르누보의 거장들이 만들고 새긴 공예품들이 일상의 소품으로 등장해 보는 재미를 쏠쏠하게 해준다. 


가우디Gaudi의 Casa Batllo, 1877(1904-1906 renovation) 바르셀로나, 스페인


 ‘청춘’, ‘근대’, ‘자유’, ‘새로움’ 이라는 뜻을 지닌 아르누보는 주로 식물에서 모티브를 따와 곡선을 사용한 것이 특징인데 그래서 ‘꽃의 양식’, ‘물결양식’ 또는 ‘당초양식’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아르누보는 새로운 세기를 향하면서도 옛 것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에 ‘영혼의 자각의 시대’라고도 한다. 하지만 아르누보가 추구하는 수준 높은 생산물은 대량생산의 어려움 등으로 대중화가 어려웠고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다보니 과도하게 장식적이어서 실용성이 떨어져 10년간의 전성기를 지나면서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고 대신 직선과 동심원 등을 이용한 단순하면서 기하학적인 면이 강조된 아르데코(Artdeco)가 유행하게 된다. (계속)

글/ 정준모 관리자
업데이트 2017.04.26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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