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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정에 선 그림, 클림트의 아델레 바우어의 초상 <우먼 인 골드(201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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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준모(미술비평, 인디펜턴트 큐레이터)

 2006년 5월 19일 외신들은 일제히 오스트리아 아르누보(Art Nouveau)의 대표적인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가 1907년 제작한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Ⅰ>가 당시로서는 그림 판매가격 중 최고가인 1억3500만 달러 즉 약 1,500억 원에 거래되었다는 사실을 일제히 보도했다. 2004년 5월 미국뉴욕의 소더비 경매에서 피카소의 ‘파이프를 든 소년’(1905년, 캔버스에 유채, 100x 81.3cm, 개인소장)이 1억416만 달러(약 1,240억원)에 낙찰된 후 2년 만에 그 기록을 깼다는 것 때문에 세상의 모든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클림트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I> 1907, 캔버스에 유화, 금박, 은박, 138×138cm, Neue Galerie, New York


 사실 당시로서는 미술시장이 가장 호황일 때였기 때문에 최고가를 경신했지만 한편으로는 과연 그 작품이 그 만큼의 예술적 가치가 있는 작품이냐? 또는 최고로 비싸게 팔렸다고 최고의 그림이냐 하는 등의 논쟁으로 이어졌고 또 그 많은 돈을 내고 그 작품을 구입한 사람이 과연 누구냐 하는 것도 사람들의 관심사였다. 하지만 이내 이 작품은 유명한 화장품 회사의 하나인 에스티 로더(Estee Lauder)의 둘째 아들인 로널드 로더(Ronald Lauder,1944~ )가 자신이 2001년 뉴욕에 세운 노이에 갤러리(Neue Galerie)의 소장품으로 구입한 것이 알려지면서 다시 한 번 입에 오르내려야했다.

  사실 세상에서 가장 많은 복제품이 팔 릴 만큼 인기가 좋고 장식적인 이 작품은 클림트의 <입맞춤>과 더불어 클림트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하지만 이 작품이 유명세를 탄 것은 가격뿐만 아니라 역시 사연이 있는 그림은 값이 나간다는 속설을 증명했다는 점에서 일 것이다. 사실 이 작품의 주인공 블로흐 바우어 부인과 클림트의 관계 그리고 이 그림의 상속자인 마리아 알트만(Maria Altmann, 1916~2011)과 오스트리아 정부와 벌였던 그림 반환소송과정 그리고 이 작품을 구입한 화장품 회사 에스트 로더의 집안과의 관계 등등이 세간의 이목을 집중한 때문이다. 


클림트 <입맞춤>(The Kiss 또는 Lovers) 1907~08, 캔버스에 유화, 금박, 180×180cm, 벨베데레미술관 오스트리아


 영화는 문제의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Ⅰ>를 상속자인 마리아 알트만(Helen Mirren분,1945~ )과 그의 변호사 쇤베르크(Ryan Reynolds분, 1976~ )가 작품을 찾기 위해서 의기투합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영화의 한 장면


2000년 마리아를 비롯한 5명의 상속자는 미국에서 오스트리아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오스트리아 정부도 맞소송으로 대응함으로서 결국 미 연방대법원에 까지 가게 되었다. 미국 대법원은 2004년 6월 마리아가 미국에서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고 판결을 내렸고, 오스트리아 중재법원은 결국 2006년 1월 알트만 등 상속인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 결과 반환이 결정된 작품은 당초 6점 가운데 부인의 초상화 2점과 <자작나무숲>(1903), <사과나무>(1912), <아터 호숫가 우터라흐의 집들>(1916) 등 5점을 되돌려 받았다.
 


 <자작나무숲>(1903)


<사과나무>(1912)


<아터 호숫가 우터라흐의 집들Houses in Unterach on the Attersee>(1916)  


 이 작품이 더더욱 유명해진 것은 작품을 두고 벌어진 ‘반환소송’ 때문이다. 논쟁의 요지는 현재 오스트리아 정부의 소유물이지만 1938년 당시 독일의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침공해서 초상화 등 블로흐 바우어의 소장 작품을 약탈해갔고 이를 전쟁이 끝나고 오스트리아 정부에 반환되었기 때문에 원주인인 상속자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Adele Bloch- Bauer,1881~1925)


 마리아는 헝가리계 유대인으로 1848년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요셉 1세가 유대인들을 다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조부모가 비엔나로 이주해 오스트리아 사람이 되었다. 그의 숙모는 바로 클림트의 후원자이자 모델이면서 연인이었던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Adele Bloch- Bauer,1881~1925)였다. 부유한 은행가이자 동아시아 철도회사의 사장이었던 아버지의 7남매 중 막내로 자란 아델레는 15세에 그의 오빠를 잃고 상심한 부모님의 뜻에 따라 홈스쿨링을 받으며 교양과 학식을 쌓았다. 18세에 자신보다 17세나 많은 유대인으로 제분업과 제당업을 했던 사업가 페르디난트 블로흐(Ferdinand Bloch, 1864~ 1945)와 결혼했다.

 무엇하나 부러울 것 없었던 부인은 그러나 자식 복은 없었다. 3명의 자녀를 출산했으나 한 명을 3일 만에, 나머지 두 명은 수 시간 만에 죽고 말았다. 조카인 마리아 등이 부인의 초상화를 비롯해서 그림을 상속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슬하에 자녀가 없었던 부부는 조카들을 무척이나 아꼈으며 늘 곁에 두었다.

  또 문화예술의 후원자로 세기말 비엔나 황금시대(la belle epoque)를 이끌어 간 클림트를 비롯해서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1860~1911), 리차드 스트라우스(Richard Strauss,1864~1949), 요하네스 브람스 (Johannes Brahms,1833~1897), 알마 말러(Alma Mahler,1879~1964), 레오 슬레자크(Leo Slezak,1873~1946), 아르투르 슈니츨러(Arthur Schnitzler,1862~1931), 프란츠 베르펠(Franz Werfel,1890~1945), 오토 와그너(Otto Wagner,1841~1918), 조지 민(George Minne,1866~1941), 카를 레너(Karl Renner, 1870~1950), 율리어스 탄들러(Julius Tandler, 1869~1936) 등 각 방면의 인사들과 교유하고 후원했다. 하지만 1925년 44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계속)


정준모 관리자
업데이트 2017.07.28 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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